입덕 4일 차
이제 너, 그놈 노래 그만 들어라.
네?
네?
네? 뭐라고요, 아부지?
잠깐 화장실을 갈 때도 휴대폰을, 아니 정확히는 내 가수를 챙겨 간다. 샤워하러 갈 때는 두말할 것 없이 최대 음량으로 내 가수를 데려간다. 외출할 때도 걸을 때도 내 귓구멍에는 그가 따라다닌다. 대청소라도 하는 날에는 블루투스를 연결해 청량한 그 목소리로 청결한 기분을 낸다.(청소를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내 방이 말끔하게 정화된 기분이다!)
일할 때는 또 어떤가. 원래는 유튜브에서 ‘일할 때 듣는 음악’ 혹은 ‘카페 음악’ 등을 검색하여 틀어 놓곤 했다. 가끔은 대형 싱잉볼 소리를 들으며 차분히 업무에 몰입한다. 사족을 붙이자면, 나는 국어 강사 일과 책 편집 일을 동시에 하고 있는데 수업이 없는 날에는 주로 책을 만든다. 그리고 그 책 만드는 일은 주로 재택근무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내 일거수일투족을 부모님이 관찰하지 않으려야 아니할 수 없는 상태인데, 부모님이 지켜보기에 이 다 늙은 딸내미 하는 꼴을 보아 하니, 몇 년마다 도지는 ‘입덕’ 병 하나가 또 도진 것이 아닌가 싶으신 눈치다.
자기네 딸이 시도 때도 없이 한 사람 목소리만 듣는다.
자기네 딸이 한 사람 목소리만 따라 부른다. (딸은 노래를 못 부른다. 그런데도 따라 부른다. 그 목소리에 단단히 홀린 듯하다.)
자기네 딸이 샤워하고 나오면서는 ‘따르레 따르레’,
밥을 먹고 식탁을 닦으면서는 ‘따르레 따르레 + 딥딥디디딥 딥딥디디딥’
조카들과 놀면서는 ‘따르레 따르레+오호~ 아임 언 에일리언, 아임 어 리그얼 에일리언~ 아임 언 잉글리쉬 맨 인 뉴요옥~’ 안 하던 영어 노래까지 한다.
자기네 딸이 입에 아주 그 한 녀석 목소리만 달고 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월요일 그 시간만 되면, 자기네 딸이 필요 이상으로 경건해진다.(조금 비장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나도 인정한다. 뭔가에 하나 빠지면 난 정신을 못 차린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연애 패턴이 좀 그러했고, 취미 생활 같은 것도 그런 편이었다. 누가 옆에서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갈 데까지 갔다가 전투가 다 끝나면 그제야 피폐해진 패잔병의 몰골을 하고서 일상으로 복귀하는 스타일이다. (심지어 아버지는 내게 강아지도 키우지 말라 하신다. 강아지에 빠지면 일상도 내팽개치고 강아지에게만 매달려 살 것 같은 사람이라고. 그래 안다. 난 그런 녀석이다.)
그래서였을까. 보다 못한 아버지가 내게 툭 한마디를 찌르고 간다.
“이제 너, 그놈 노래 그만 들어라.”
네? 뭐라고요, 아부지?
그런데 여기서 내가 발끈하는 지점, 혹은 주목하는 어휘는 ‘그만 들어라’가 결코 아니다. 바로,
‘그놈’이다.
네, 아부지, 뭐라고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물론 아부지 딸내미가 아주 일찍 시집갔으면 아부지께 '그놈'은 손주뻘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도요, 아무리 그래도요 아부지, ‘그놈’이라니요.
아버지는 명령조로 그 가수의 노래를 그만 들으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본업인 설거지를 하러 가족의 식탁을 유유히 벗어나신다. 딸자식에게 ‘정신 못 차리기 1단계’ 경고등이 켜진 것을, 아부지도 눈치챈 듯하다.
그러나 이성보다 감성이 충만해진 그 딸내미는,
“따르레~ 따르레~ 따라라르레~”
“다른~~ 길을 걸었떠언~ 우리가 만나 가트흔 길을 걷고호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귀에(여기에)~ 꿈을 찾아 여귀에~~ 그 누구도 말을 안눼~~”
“다시 토(다시 또)~ 음악은 흐르고~ 따뜨뜨드따뜻따뜨 따뜻뜨르뜨뜨”
“저 빠돠에 누워~ 외로운 물쌔 될까아~~”
“어떤 이눈~ 꿈을 간직하고 살고~~ 세상에 이토록 많은 캐썽들(개성들)~~나는 누굴까~ 아무 꿈 없지 않나~ 나는 누굴까~ 내일을 꿈꾸는가~”
“오호 아임 언 에일리언, 아임 어 리걸 에일리언~ 아임 언 잉글리쉬 맨 인 뉴요옥~ ~~ 비 유어쎌~ 노우 매러 왓데이쎄이~ 비유어쎌ㅍ~ 노매러왓떼쎄이~”
오늘은 결승전을 하루 앞두고 이 입덕녀, 정신 못 차리기 2단계로 진급한 듯하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까지 할 기세다.
(그나저나 우리 아부지, 내가 ‘그놈’에게 빠진 걸 어떻게 아셨지? 가족들에게 제대로 ‘덕밍아웃(입덕 커밍아웃)’도 안 했는데 말이다. 거참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역시 감기와 덕질은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나 보다.)
오늘도 내 휴대폰 잠금화면 및 배경화면에는 ‘그놈’이 아닌 ‘그’가 ‘세상 해맑게’ 활짝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