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덕 9일 차]
나는 임용고사 시험을 일곱 차례나 낙방하고서 뒤늦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몇 번의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며 변두리의 삶, 혹은 겉절이의 삶을 살아왔다. 글을 쓰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일 뿐이었다. 비교적 안정적이고 안전한 교사라는 직업을 얻기 위해, 남들이 올라타기에 나도 그저 무작정 그 '임용'이라는 열차에 올라탄 채, 장장 6~7년의 시간을 ‘시험공부’에만 오로지 매진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매진(邁進)의 결과는 나의 20대 매진(賣盡). 나의 이십 대는 수험생활로 다 팔려 나가 버리고 잘려 나가 버렸다. 물론 그 시간들이 나를 단단히 다져 주었으리라 믿지만 20대를 뒤돌아보았을 때 특별히 기억나는 사건이 없다. 새벽 5시 30분쯤 일어나 6시까지 도서관에 간다. 열람실의 휑한 새벽 공기 속에서 두꺼운 수험 서적과 오늘의 개인 일정표를 묵직한 마음으로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그런 아침의 반복이 나의 20대였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도 나는 교사가 되지 못하였다. 공부의 양이 부족했던 걸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걸까. 공부의 양이 부족했다고 치기에도, 그 시간 동안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치부하기에도 내가 투입한 세월은 너무나도 길다. 반성이나 성찰 따위 관두자. 지나간 일이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그대로 의미가 있다지 않은가. (정말 의미 있나?) 자, 다시 팬질이나 하자.
팬덤-열성 팬 무리
악개-악성 개인 팬
팬코-팬코스프레, 팬 이름 달고 다른 가수 비난하면 듣는 말
피케팅-피나는 티켓팅
포도알-콘서트 좌석
셀털..
…
누군가 팬카페에 초보 덕질용 용어를 잔뜩 올려 주었다. 깨알 같은 친절함에 깊은 감사의 답글을 달고 찬찬히 읽어 내려가 보았다. 악개? 머글? 덕메?
하아. 어렵구나.
팬덤, 성덕(성공한 덕후)이나 사녹(사전 녹화), 룸곡(눈물)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악개, 팬코, 이선좌, 셀털, 덕통사고.. 이게 다 뭐야? bgm을 브금이라 안 하고 비지엠이라고 하면 나이가 가늠된다고 쓰여 있다. 지금까지 ‘브금’이란 글을 보면 ‘뭐여? 불금을 잘못 썼나?’ 했었더랬다.(정말 나이 가늠된다.)
역시 어렵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재밌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이모 팬으로서 열심히 공부해 봐야지, 라는 열의가 불끈 솟아오른다.
(내가 진작 이렇게 공부를 했으면...)
열심히 덕질 용어를 공부 중인데 또 다른 게시글이 새로 올라온다.
<휴대폰으로 너튜브 영상 돌리면서(들으면서) 업무도 동시에 해야 할 땐 이렇게!>
너튜브 프리미엄 같은 것에 가입하지 않아서 나는 너튜브 광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고, 너튜브 화면에서 빠져나오면 더는 그 영상을 제대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그런데 역시나 똑똑한 팬들이 어수룩한 나 같은 팬을 가르쳐 준다. 크롬chrome을 열고 들어가 http://를 치고 너튜브를 입력, 내 재생목록을 만들어 두면!
너튜브를 계속 재생하면서도 휴대폰으로 내 업무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이런 신세계가 있다니!)
이렇게 덕질 열공 삼매경에 빠져 있다 보니 문득 그 시간, 그 공간이 떠오른다.
새벽 6시 반. 도서관 가장자리, 그 구석진 곳에서 국어 수험서를 펴며 내 이십 대를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 넣던 그 시간들이 떠오른다. 더 넣을 데가 없을 만큼 과도하게, 하루 12시간 내지는 13시간, 문법을, 현대문학을, 고전문학을, 교육학을 욱여넣었다. 그땐 그렇게 ‘공부’라는 것이, 생존과 직업만을 위한 공부라는 그것이 참으로 힘들고 정말 벅찼다.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꽉 막힌 ‘벅참’들...
그러나 이제는 그때와는 다른 ‘벅참’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벅참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이 넘칠 듯한 벅참이다. 꽉 막혔던 ‘벅참’이라는 통로를 비집고 계속 꾸역꾸역 살아 봤더니, 지금처럼 뻥 뚫린 ‘벅참’도 내게 온다.
물론 세상은 나에게 기쁨과 슬픔의 순서를 교차해서 보여 주지 않을 것이므로,
지금 내 가수님으로 인한 이 기쁨과 환희들, 이 ‘따뜻한 울렁임들'은 언제고 또다시 내 생(生)의 ‘슬픔’이나 ‘서늘한 울렁임’들과 그 자리를 맞바꿀지 모른다.
그래도 지금만큼은 좋다.
오늘 한 번 기뻤으니 내일 두 번 슬프다 해도 그다음 날 다시 크게 한 번 기쁘면 된다.
내 가수님으로 인한 요즘의 이 즐거운 시간들은 어쩌면,
내 20대를 세상에 헌납해 버린 데 대한 작은 보상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좋아해서도 안 되고, 누군가를 좋아할 시간도 없었던 그 20대의 시간들이 가여울 때면 나는 내 가수의 노래를 조용히 꺼내 듣는다. 오늘도 내 가수는 나에게 작은 위로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