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책장봄먼지 Dec 28. 2023

메모장을 세상 밖으로

'아무튼, 메모'를 읽고

...
만약 집에 불이 났고 소방관이 그 노트를 구해 번쩍 들고 나온다면 나는 그분의 섬세함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나를 구해 온 거니까.(35)

우리 집은 화재경보기가 시도 때도 없이 오작동을 일으킨다. (이미 양치기 소년이 되어 버린 오작동 기기. 우리 아파트 사람들은 '대피하십시오, 대피하십시오'라는 경고성 발언이 울려도 집 밖으로 나와 보지도 않는다.) 그래도 나는 꾸준히 가방을 멘다. '이번에도 속겠구나' 하면서 짐을 챙긴다. 그때 내 가방에는 usb와 노트북이 담긴다. 일기장은 너무 많아서 챙기지를 못한다. 그저 usb에 내 모든 글감과 상상력이 들어 있으므로 그거 하나라도 구하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을 것이다. 내 usb에는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수많은 내가 '메모'의 형태로 담겨 있으니까.


그런데 대체 그 메모란 것이 무엇이기에?

, 우선 '아무튼, 메모'라는 책 속으로 들어가 메모라는 녀석을 파헤쳐 본다.


이 책과의 인연은 아주 사소한 우연에서 시작한다. 도서관에 가면 한 번쯤은 들르는 코너가 다. 머리가 무거울 때면 조금 덜 무거운 마음으로 접근할 수 있는 '아무튼' 코너로 간다. 그날은 '아무튼' 시리즈 가운데 '아무튼, 인기가요'와 '아무튼, 비건' 등을 고르다가, 엉겁결에 '메모'라는 말에 꽂혀 '아무튼, 메모'까지 대출해 왔다. 그런데 웬걸? 메모 그 이상의 메모로 남을 이야기가 거기 있었다.



한 외로운 사람이 불을 켜고 책을 읽는다면 그 시간은 '영혼의 시간'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좋아하는 책들에는 늘 영혼이 있었다.(28)

저자는 라디오 피디. '아무튼, 메모'는 '유머 한 스푼'을 섞은 자조 섞인 성찰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얼핏 비메모주의자'인 듯 보였던 저자의 '메모' 속에는 '책'을 향한 사랑이 아주 짙게 깔려 있다. '책'과 '메모'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영혼의 동반자이자 바늘과 실. 타인의 생각을 마음껏 들여다볼 수 있는 책 속에서 나 또한 한 줄 한 줄을 길어 올리며, 저자가 정성 들였을 문장들에 감탄하곤 했다.



괴로움 속에서 말없이 메모하는 기분은 얼음 밑을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 것과도 같다. 곧 봄이 올 것이다.(57)

하루하루가 제대로 풀리지 않아서 내 인생 전체가 온통 풀리지 못할 것만 같을 때가 있다. 그때 그 얼어붙은 괴로움 속에서 나는 내 삶에 균열을 내어줄 단 하나의 작은 시작을 막연히 기다린다. 그 기다림의 끝을 앞당기는 것이 어쩌면 '메모'일지도 모른다.

'아무것'이라도 적다 보면 '아무튼' 흐트러진 글자들 속에서 기어이 '나'를 만난다. 무언가를 적던 손길은 마침내 해빙의 기지개를 켠다. 저자의 말대로 봄은 우리의 괴로움 아래서 그다음을 준비하고 기약한다.




'꿈'이란 아니면 말고의 세계가 아니다. 꼭 해야 할 일의 세계다. 꿈은 수많은 이유가 모여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일, 포기하면 내가 아닌 것 같은 그런 일이다. 진짜 꿈이 있는 사람들은 꿈 때문에 많은 것을 참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용감하게 선택하고 대가를 치른다.(109)

꿈의 전, 중, 후 그 모든 과정에 참여하는 도구가 바로 메모다. 메모는 나의 꿈을 부추기고 더 나아가 우리의 꿈까지 북돋는다. 이 책에서 저자의 메모는 점점 자신의 음량을 높인다. 자기 안에서만 떠돌던 작은 메모들이 세상 밖으로도 조금씩 조금씩 목소리를 낸다. 처음엔 자기만을 위한 글자였을지 모를 것들이 사람(세월호), 동물, 역사(조선인 전범) 등 더 큰 메모가 되어, 그 목소리가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진다. 메모의 효용이 나 자신의 꿈을 비추는 데서 멈추지 않고 우리의 꿈으로도 나아가는 것.



나는 어땠나.

나는 오직, 이 작은 세상에서 나 자신을 채우기 위한 메모에만 급급했다. 사적인 이야기를 얹자면, 나는 복지관에서 일한 이력이 있다. 나는 나 아닌 타인-청소년들-의 세계를 돌보고 비추는 데 좀 지쳤었다. 그 3년 4개월의 시간을 끝내 저버리고 나서야 느낀다. 나, 더는 그들을 '메모하지' 않았다. 그 후로 타인과의 연대의 끈은 점차 사라졌고 흐려졌다. 나는 내 세상을 향해 달리려고 퇴직했지만, 사실 그건 내 세상 안으로 갇혀 버린 것일 수도 다.


어땠을까.

세상을 조금 더 크게 쓰며(use)

또 깊게 쓰며(write) 사는 것은 어땠을까. 

'메모'라는 작고도 위대한 행위를 하면서 말이다.



'아무튼, 메모'

웃으며 시작했다가 깊은 끄덕임으로 마무리한 책이었다, 고 이 책의 서평을 이렇게 '아무튼, 메모'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 기준 노트 만들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