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 건 딱히 없지만 전시는 끝이 났다. 뿌듯함보다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도서관 시민 북큐레이터 활동 기간은 (여름 방학 한 달을 포함하여) 무려 8개월. 배운 내용, 토론한 내용을 토대로 4개 조 시민 북큐레이터 조원들은 2023년 12월 한 달간 큐레이션 도서들을 전시하였고, 2024년 1월이 되자 우리의 전시는 이내 철거되었다.
북큐레이션 활동 후 남은 것은 무엇일까?
다행히도 수건 하나가 남았다. (강사님께서 수강생들에게 수건을 하나씩 선물로 주셨다.) 사실 내가 속한 조는 '그림책'을 주제로 했기 때문에 그림책 문외한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글씨 쓰는 것 하나는 조금이나마 자신이 있어 캘리그래피에 도전해 볼까 싶었지만 캘리가 '미술'의 영역이었구나, 새삼 절감하며 적당히 좌절했다. 책 소개 문구라도 예쁘게 쓰고 싶었지만 다른 분께서 미리 다 해 오시는 바람에 이번 북큐레이션 전시에서 내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 그래도 어딘가 내 흔적 부스러기라도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부스러기를 한번 찾아가 본다.
시민 북큐레이터의 혜택? 14권 대출 가능! 최장 5주간 대출 가능!
처음에는 이 달콤한 호사를 제대로 누렸다. 평소 7권까지만 빌릴 수 있었는데 시민 북큐레이터가 된 이후에는 14권까지 도서를 빌릴 수 있었다. 내 양 어깨는 아우성을 쳤지만 마음만큼은 즐거웠다. 도서관에서만큼은 엄청 부자가 된 것 같았다. (게다가 도서관 회원증 소지자인 아부지를 데리고 가서 책 7권을 더 빌리는 날도 있었다. 그럼 도합 21권! 한 달의 양식이 아주 아주 넉넉해서 배가 부를 정도였다.) 물론 그렇게 잔뜩 책들을 집에 빌려 놓고,
"반납 기한이 다 되었습니다."
이런 문자를 받으면 화들짝 놀라서 읽지도 않은 채 빌렸던 도서의 절반, 혹은 때때로 2/3의 도서를 고대로~ 도서관에 가져다줄 때도 있었다. 그저 난 '책 빌리기 중독자'였던 것 같다.
큐레이션은 편집이다!
북큐레이션 강의를 들으며 느낀 것은 역시 어느 분야나 '편집'이 필요하다는 것. 숱한 정보들을 접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집약해 제시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미라클 모닝'과 '오운완(오늘의 운동 완료)'라는 용어만 보아도 자기 관리에 철저한 현대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반반차'를 쓸 정도로 시간을 무척 아끼는 부류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에게, 즉 우리에게는 모든 책을 다 읽을 시간도 없고 그러기엔 이 세상의 책과 정보가 너무나 넘쳐난다.
그래서 도서관에서는 큐레이션에 공을 들인다. 계절별 혹은 절기별 큐레이션, 연령별 큐레이션, 기념일(환경, 역사 등) 관련 큐레이션, 혹은 컬러별 큐레이션까지. 독자들에게 단순히 북큐레이션 기술을 보여 주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다. 북큐레이션은 서점의 판매율과 도서관의 대출률 증가를 목표로 하여 시민들이 책에 관한 '발견성'과 '활용성'을 높이게끔 의도한다. 무엇보다 북큐레이션을 통해 지속적인 독자층을 형성하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다.(라고 배웠다.)
북큐레이션의 또 다른 한 축은 전시
전시의 핵심은 '시각'에 초점을 둔다. 특히 얼마나 많이 이용자들에게 '노출'되느냐가 중요하다. 미디어나 기기(예: 세로형 디스플레이)를 활용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강력한 디스플레이는 바로 '실물 책'의 전시다. 직접 만져도 보고 실재하는 정보들(이성 혹은 감성을 자극하는 글귀들)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실물 책의 매력이라고 볼 수 있다.
나만의 도서 대출 큐레이션 발표. "열다섯이 보는 시선, 열다섯을 보는 시선"
강의를 마무리할 즈음, 개별 발표가 있었다. 어버버거리며 시작한 나의 발표. 주제는 '열다섯에 관한 시선'이었다.
평소 청소년 소설에 관심이 많다. 직장을 관두며 '나의 청소년들'에게 못다 준 사랑이 많아서인 것 같다. 이번 북큐레이션 발표를 계기로 앞으로는 이곳 브런치에도 '청소년 소설에 관한 리뷰를 연재해 보겠다는 원대한 계획도 세워 뒀다.
오일파스텔화와 캘리그래피를 배우던 시간은 결과물을 떠나 힐링의 시간
"오, 잘하셨어요. 잠깐만요, 사진 좀 찍을게요."
작년 한 해 직장에서 하도 지적을 듣고 살아서인지 강사님의 칭찬 한마디에 기분이 노곤노곤 포근포근해졌다. 도서관에서는 북큐레이션 수업 외에 다채로운 수업을 준비해 주셨는데 바로 캘리 수업과 오일파스텔화 수업이었다. 극히 부족한 실력이었고 처음 해 보는 작업이었지만 의례적일지 모르는 칭찬을 들었는데도 기분이 꽤 좋았다. 게다가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의 온도에 맞춰 파스텔을 문질러 하늘을 만들고 바다를 만들 때는 정말 그 순간,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저절로 풀어졌다. 굳었던 그간의 긴장을 잠시나마 녹일 수 있었다.
그리고 소책자 하나가 남았지
책 소개 글은 (다행히) 내가 적었다. 내 흔적이 유일하게 남은 곳은 이곳이구나.
그 외 수많은 추천 도서들도 만났다. 북큐레이션이 아니었으면 접하지 않았을 책들이었다. 새로운 책은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문이 되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
'남은 건 기념 수건뿐'이라던 내 말이 잘못된 거였네.
생각보다 남는 게 많았다. 글을 적다 보니 알겠다.
손에 쥐는 것, 눈에 보이는 것만이 '남는 것'에 속하는 건 아닌 듯하다.
책도 마찬가지. 책을 읽는다고 당장 손에 잡히는 것도, 눈에 뜨이는 성과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책은 언제나 내게 무언가를 남겼다. 그 '남김'들 덕분에 지금도 이런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