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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Jan 06. 2024

사랑이 찾아간 제자리

사랑이 태어난 곳

"좀 많이 멀긴 한데 관심 있으면 여기 한번 지원해 봐."


나는 '늦-'으로 시작하는 접미사가 참 잘 어울리는 구석이 있다. '늦깎이', '늦되다', '늦들다'...



그중에서 '늦깎이 알바생'이었던 시절을 돌이켜본다. 중간중간 강제로 쉬어 가는 페이지가 너무도 많았던 내 삶. 그 한 페이지에서 만난 출판사 아르바이트. 그건 다름 아닌 내 동생이 검색해 준 자리였다.(동생은 검색 대마왕, 아니 검색의 왕이다.) 


새벽 5시가 되기 전에 일어나 6시에 집을 나선다. 7시 20분에 합정역에서 파주로 출발하는 회사 버스를 탄다. 일단 한번 놓치면 답이 없는 먼 거리. 매일 아침마다 경기도 남단에서 경기도 북단으로, 나는 정식 '아르바이트생'이 되어 몇 개월간 출근이란 것을 한다. 디자인편집 팀 소속으로, 누군가 관둔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켠다. 회사 메신저에는 '아르바이트'라는 직함이 반짝인다.   


"할 만해?"

처음엔 너무 할 만해서 탈이었다. 정해진 3~4개월 그 이상으로 되도록 오래 그곳에 머무르고 싶었다. 여기 어디 허드렛일이라도 없을까요? 저, 일 좀 시켜 주세요, 뭐 이런 심정. 8시부터 시작하는 근무였고, 말도 못 하게 엄청난 양의 피로가 매일 새벽마다 나를 덮쳐 왔지만 나는 책 소개 글을 작성하는 그 아르바이트에 푹 빠졌다. 보도자료 등을 참고하여 600~700권의 소개 글을 작성하면서 이 책 저 책의 매력에 허덕였다. 책상 위에 단행본 도서들이 고층빌딩처럼 쌓여도 "근무 시간에 누가 책을 읽어?"라고 눈치 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읽고 쓰는 일이 알바생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 이런 일을 하고 싶다,라는 낭만적인 생각을 하다 보니 아쉬운 4개월이 훌쩍 지났다. 물론 출판사의 본질적인 일을 했던 것이 아니고 겉핥기식으로 일을 했으므로 뭐든 좋아 보였던 같다. 그 안에서는 더 치열하고 더 거친 고민들이 있었을 테지. 

마음만으로 풀리는 인생이란 좀체 없기에 나는 아쉬운 막을 내리고 그 겨울을 떠나보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떠나보낸 그곳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봄봄(=나) 씨, 동생이 프랑스 번역한다고 그랬지?"


'고작'이라 치부할 수도 있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무척이나 따듯하게 대해 주셨던 팀장님이 계셨다. 그 팀장님이 수년이 훌쩍 지난 후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지셨다. 

"오, 네네."

"우리 출판사가 유아책 브랜드를 만들려고 하는데 프랑스 쪽이야."


매번 넘어지고 나뒹굴어서 여태 제값을 못하는 나와 달리 동생은 제 역할을 톡톡히 하며 살아왔다. 지금껏 제대로 된 직장에 들어갔던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던 나. 어느 날 이력서를 쓰다 말고 뒤돌아보니 그런 직장들은 모두 내 동생이 이곳저곳을 열심히 검색해 준 덕분이었다. 수렁에 빠질 때마다 그 구렁텅에서 나를 건져 올리려고 엑셀표(면접 지원 일정)까지 작성했던 녀석이 바로 내 동생이다.

그런 동생에게 드디어 내가 보은할 기회가 온 것인가!


"네. 동생이 프랑스어를 해요. 이 책 저 책 번역했어요! 동생도 좋아할 것 같아요."


나는 동생에게 일감을 연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했다. 반면 동생은 차분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가격이 맞아야지."

아, 그렇구나. 나는 세상이 하도 나를 안 찾으니 세상이 아주 가끔 내게 일을 요청할 때마다 '어서 옵쇼' 하며 늘 저자세로 '암요, 암요~'를 외쳤다. 동생을 보며 깨닫는다. 아, 이런 것도 '선택'을 할 수 있는 거구나. 


아무튼 나도 백만 년 만에 처음으로 동생에게 좀 도움이 되는 건가! 혼자 뿌듯해하고 있었는데....

'어? 아... 아니네.'

아니었다. 이게 내 덕이 결코 결코 아니었다. 



"좀 많이 멀긴 한데 관심 있으면 여기 한번 지원해 봐. 당신이 출판사에서도 일하고 싶어 했으니까 여기 알바 일도 괜찮을 것 같아. 쉬는 동안 한번 해 봐."

언니와 동생의 순서가 뒤바뀐 것처럼 지내온 나와 내 동생. 동생은 제 목소리 못 내고 제 역할 못 하는 언니를 부단히도 염려해 주었다. 그 염려의 아주 깊은 끝에는 아마도 이것이 있었겠지.


'사랑'


내 덕에 동생이 일감을 얻은 것이 아니라, 동생 자신이 먼 옛날 나에게 베풀었던 사랑이, 다시 돌고 돌고 돌아 자기 자신에게로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간 것이었다. 사랑이란 것. 때로는 이렇게 생각지 않은 방식으로 되돌아온다. 동생은 5년 전 나에게 출판사 아르바이트 자리를 물어다 주었고, 1년 전 그 출판사로부터 번역 작업을 제안받는다. 지금은 그곳에서 이럭저럭 여러 프랑스 동화책이 출판되었고 내 동생 역시 무럭무럭 일을 곧잘 해내고 있다.



사랑은 언젠가 제자리를 찾는가 보다.

못나과 늦된 언니를 위해 고군분투하던 동생의 시간과 그 시간의 베일 속에 감춰 있던 사랑이,

어느새 자기가 본래 있던 자리를 찾으러 간다.


사랑은 태어난 곳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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