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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Jan 13. 2024

책 말고 책갈피 수집 중독자

책을 열심히 읽은 시간보다 책갈피를 모아 온 시간이 더 오래되었다. 스물을 갓 넘겼을 때는 강박적으로 예쁜 그림만 보면 오려다가 코팅을 하였다. '모아 두기만' 하고 책에 끼울 생각은 잘 안 했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책을 읽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대학교 문구점에서는 뭐 이런 걸 다 코팅하지? 뭐에다 쓰려고?

"책갈피 하려고요."

문구점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하지만 나는 동료가 있었기에 외롭지 않았다. 나의 친구 H도 나처럼 책갈피 만들기 중독자였다. 대학교 문간에다 아무나 가져가라고 놓아둔 잡지가 하필 '갬성적'이었다. 우리는 매주 그것을 무료로 가져다가 서로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야기하며 학과 공부는 뒷전인 채로, 책갈피를 오리고 모으는 일에만 열중하였다.


세월이 훌쩍훌쩍 흐른 요즘은, 책갈피를 굳이 만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책을 읽다 책갈피가 없으면 허전하다. 그래서 개방해 본 나의 책갈피 서랍!



매년 서울국제도서전에 가는데 거기서 책은 얼마 안 사면서 이런 책갈피는 혹해서 잘도 산다. (정작 저 책갈피가 가리키는 책들은 내게 별로 없다는 거+_+)



출판사 굿즈, 광고 소책자나 띠지는 아주 즉흥적이고도 유용한 책갈피가 된다. 책을 보다가 책갈피 속 다른 홍보 책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스티커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갈피다. 무엇보다도 얇다. 책 사이에 숨어들기에 아주 적절하다. 책장 사이에 쏙 들어가서 좀체 빠져나올 생각을 안 하는, 의외로 단단한 녀석이라 믿음직스럽다. (특히 물방울 스티커는 내가 아껴 쓰는 스티커. 비가 많이 내린 날에만 하나씩 떼어다가 다이어리에 붙였는데, 방울방울이 매우 예뻐 보여아직까지 거의 다. 스티커는 문구 회사를 퇴사한 다른 친구 Y의 선물이었다.)



아래의 포장지들은 친구 J가 선물해 준 것이다.

이건 작년에 받은 tea 봉투들. 귀여운 포장지에 담아 직장 동료분께서 내게 건네주셨다. 귀여운 것들을 특히나 애정하는 편인데 차 선물을 이렇게도 줄 수 있구나, 하며 매우 기쁘게 받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책을 읽다가 우연히 코끝에 차 향이 스쳐 지나갈 때가 있다. 그러면 책장을 덮고 가만히 차를 마시던 순간으로 돌아간다. 이보다 더한 힐링은 못 봤다.



성령 가득한 책갈피. 보좌신부님들의 사제 서품 문구도 책갈피로 쓰고, '성령 칠은'도 책갈피로 애용한다. 천주교에서는 매년 성령강림대축일에 '성령칠은'이라는 은총을 받는다. 이와 관련하여 미사 중에 성령 칠은 카드를 하나씩 져가라고 하는데, 한 해 두 해 모으던 것이 여럿이 되었다. (참고로 '지혜, 통찰, 식견, 용기, 지식, 공경 그리고 경외'가 성령 칠은에 속하는 일곱 가지 은총이다.)



직접 만든 작품을 책갈피로 사용하,기도 한다. 오른쪽 사진의 잠자리들은 우리 엄마가 수십 년 전에 만들어 놓은 작품. 저걸 왜 만드셨더라, 기억은 안 나지만 예뻐서 책갈피로 종종 쓴다. 화분 그림은 도서관에서 실시하는 그림 그리기 수업에 참여하여 만들었던 것. (졸작이어도 책갈피로는 손색이 없다.)



뭐니 뭐니 해도 가족과 친구의 손 편지 선물은 아주 달콤한 책갈피가 된다. 책을 읽다 말고 친구나 가족의 마음을 읽는다. 그럴 때마다 책 읽는 내내 '혼자이면서 동시에 함께 있는 마음'이 된다.



그 밖에 내 최애의 얼굴이나 포켓몬 카드(내 쌍둥이 조카의 선물)도 책장과 책장을 구분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멋진 책갈피다.



이런 나(책갈피 중독 증상이 있는 나)를 알고 있는 친구 J는 직접 가을 낭만을 주워다 내게 책갈피를 선물해 주었다. 책갈피와 함께 받은 차받침도 있다. (가끔 이 차받침도 나의 훌륭한 책갈피가 되어 준다.)




책갈피가 없을 때는 붙임 쪽지가, 붙임 쪽지도 없는 '다급한' 상황일 때는 주변의 냅킨도 훌륭한 책갈피가 되어 준다.


갈피1_겹치거나 포갠 물건의 하나하나의 사이. 또는 그 틈. 

갈피2_일이나 사물의 갈래가 구별되는 어름.

(#표준국어대사전)



살아다가 생의 갈피가 흔들릴 때는 잠시 그 사이에 갈피를 끼워 두면 좋다. '나'라는 책이 가끔 삶의 여진에 주춤거릴 때마다 잠깐 책갈피를 꽂아 두고 멈춰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듯하다.



어차피 우리의 '책'은 책갈피를 다시 집어드는 순간, 

다음 책장으로 넘어갈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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