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세종으로 향했다. 재작년부터 큰이모가 계셨던 곳이고, 이제는 사촌언니(나와 열 살 차이가 채 나지 않는 사촌 언니)가 머무를 곳이다.
"(소곤소곤) 근데 생각보다 분위기가 좋네?"
이번엔 어린 첫째 조카까지 따라나선 길이었다. 조카는 자기가 짐작했던 것과 달리 간간이 웃으며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그곳의 분위기가 낯설었다. 젊은 사람이 머무를 곳으로는 더더욱 안타까운 곳이었겠지만 우리 식구들은 많은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미 다 흘려버렸을 수도, 너무 잘 알던 끝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 친척들은 종종 웃었고 이따금 사촌 언니를 추억했다, 어제까지 같은 하늘 아래 있던 우리 수○ 언니를.
"이모, 장례식장 몇 번 가 봤어?"
"여러 번 가 봤어."
"난 오늘 처음 가 봐."
빗속을 뚫고 달려야 하는 길이라 하루 늦춰서 가야 할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어린 조카의 뜻대로 하길 잘했다. (조카는 중요한 일이니 자기도 가고 싶다고 당당히 선언했다. 이미 준비하고 있었으니 비가 많이 오더라도 한번 가 보자고, 어른들에게 정중히 제안하기까지 했다. 조카의 이 한마디를 시작으로 우리 집도, 다른 친척집도 기를 쓰고 빗속을 뚫었고, 결국 우리는 모두 만났다.)
"수○가 갔어."
만나자마자 엄마의 언니(나의 이모)는 딸의 죽음을 한마디로 집약한다.
"갔어. 불쌍한 것."
우리 엄마는 조카의 죽음을 다시 한번 전해 들으며 새벽 통화 때처럼 눈물을 보인다.
사촌 언니가 갔다. 조금 서둘러 갔다. 아니, 사실 빨라도 너무 빨리 갔다. 나이로 따지자면 한창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신나게 일하고 일하다가 누군가를 또 신나게 욕하고 이따금 누군가를 끔찍이도 사랑했어야 하는 나이다. 만약 결혼을 했다면 중고생, 혹은 대학생 딸내미, 아들내미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언니가 수○ 언니 글을 써 주어도 좋겠다. 제목은, <아니, 어떻게 사셨어요?> 이렇게."
언니의 병세를 처음 전해 듣고 동생이 내게 한 말이다. 혼자 떠돌며 살아온 수○ 언니의 삶이 안타까웠던 우리가 대화 끝에 나누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삶이 끝나가는, 혹은 죽음이 다가오는 언니의 인터뷰를 한마디도 받아 내지 않았다. 나 살기 바빴고 먼 곳에서 '아직 살아 있음'이라는 희미한 조난 신호만을 틈틈이 우리 엄마에게 보내오는 언니의 생명을, 나는 그저 기도로만 가끔 찾았을 뿐이다. (너무 커다란 죽음의 크기가 내게는 무거웠다고, 핑계를 대 본다.)
그래도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최악이었던 몸의 컨디션을 떨쳐 내고, 나는 세종으로 향했다.
"꽃이 예쁘지? 그치?"
수○ 언니의 엄마, 곧 나의 여든 넘은 이모는 딸자식의 영정 앞에서 예쁜 꽃을 자랑했다.
"이것도 다 자기가 스스로 상조회사에 미리 가입했던 거래. 거기서 바로 와서 이렇게 장식해 주고 갔어."
어렸을 때부터 너무 예뻐서 뭇사람들이 자주 감탄의 시선을 보내곤 했던 했던 수○ 언니, 지금 같으면 아이돌을 하고도 남았을 우리 수○ 언니.
그러나 가족들의 풍요 하나만을 바라고 몸 바쳐 마음 바쳐 자신을 희생했던 수○ 언니.
오랜 시간 타지를 떠돌다가 겨우 한국으로 들어와 가족들 곁에서 뿌리를 내리려 했던 수○ 언니.
가기 싫은 발걸음을 두고도, 자신에게 마지막 꽃을 부조(扶助)하는 마음으로 상조회사를 알아보았을 수○ 언니.
'상주'에는 남동생들의 이름, '가족'에는 엄마의 이름만을 올려야 했던 수○ 언니.
자신의 죽음을 예비했을 언니의 마지막이 어른거린다.
어떤 끝에는 이유가 없다. 왜 그 삶이 끝나야만 하는지, 갑자기 안타까워 그렁거림이 두 눈 안에서 울컥 피어오른다.
언니가 언니 자신을, 그리고 언니를 찾아오는 우리를 위해 준비했다는 그 예쁜 꽃 아래서 우리 모두는 꽃을 올리고 절을 올리고 기도도 올린다. 각자의 애도와 천주교식 단체 연도가 끝나고 접객실로 옮겨 우리는 못다 나눈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 연락 한 번 없다가 이런 경조사 때나 만나네, 멋쩍은 인사를 나눠야 했지만 그런 인사라도 나눌 수 있어 다행이었다. 장소가 주는 엄숙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는다. 이렇게 친척간의 안부는 언니의 마지막에서야 이뤄진다. 죽음에서야 생의 안부를 묻는 우리들이다.
6개월 판정에 6~7년을 더 살다 간 언니다. 그래서 다행이었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더 오래 아프더라도 더 오래 머물렀다면 더 좋았을지 모른다. 언니가 살아 있는 동안, 사람들은 기적이라는 이름을 에둘러 붙여 주었다. 하지만 언니는 너무 아팠을 것이다. 병원과 집만을 오가는 생활이 단순히 '기적'이라는 이름이었을 수만은 없다.
결국 기적은 언니의 꽃 앞에서 피어난다. 우리는 언니 앞에서야 언니를 만나고 언니를 추억하고 언니를 떠올리며 웃는다. 언니는 사랑이라는 기적을 남기고 갔다. 정말로 갔다.
돌아오는 길, '어린이'라는 이유로, 그저 '피어나는 삶'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갖 어른들에게서 칭찬 세례를 듬뿍 받고 용돈까지 '어린이 연봉' 수준으로 받아 챙긴 우리 첫째 조카. 조카는 아직도 의문을 지닌다.
"그래도 분위기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어."
누군가 죽었는데 마냥 울지만은 않는 어른들의 모습이 조카에겐 생경했을 것이다.
"아픔이 끝나서 그래. 너무 아팠거든. 언니의 그 고통이 끝나서 그래도 다행이다, 다들 그런 걸지도 몰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 이런 마음이 아니다.
살았던 사람을 잘 보내야지, 마지막은 웃으며 잘 보내야지, 외려 이런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마지막을 예쁜 꽃으로 스스로 부조했던 언니를 떠올린다.
정말 예쁜 꽃이었던 언니를 이 글로라도 부조(扶助)하여 본다.
-평생 홀로 쓸쓸했을 박○○ 언니를 추모하며, 그리고 사랑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