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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Feb 07. 2024

악성 댓글에 '좋아요'를 눌러 보신 적이 있나요

(작년의 일이다.)


"악성 댓글을 써 본 적이 있나요?"

체험관에 온 아이들에게 묻는다.


연령이 높을수록 손을 들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게 꼭 나이 때문만은 아니다. 때로는 중학교 3학년 학생들도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다. 그럼 나는 다시 묻는다.


"악성 댓글에 혹시 '좋아요'를 슬쩍 눌러 보신 적 있나요?"


이러면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아까보다는 응답자 수가 많아진다. 아무도 모르니 '좋아요'쯤은 괜찮을지 모른다. 아이들 앞에 서 있는 나 역시 비교적 가벼운(?) 악성 댓글에는 '좋아요'를 눌러 본 적이 있다. (이런 주제에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다니, 좀 아이러니;)


사실 내가 직접 악성 댓글을 달아야만 상대에게 타격을 주는 것이 아니다. 악성 댓글을  않더라도 '좋아요'를 눌러 주면 그게 곧 악성 댓글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악성 댓글의 몸집을 불려 주면 댓글은 자꾸 힘이 세져요. 덩치가 커지면 사람들 눈에 더 쉽게 뜨이겠죠."


몇몇은 고개를 끄덕이고 몇몇은 그만 듣고 싶어 한다. (체험관인데 '체험은 언제 해요?'라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체험으로 옮겨야 할 때라 느끼고 다음 말을 건넨다.


"이제 마음을 담아 댓글을 써 볼 거예요."


나는 이어지는 다음 활동을 알리고, 댓글 상황을 몇 가지를 보여 준다. 다음은 그중 하나.



https://youtu.be/OnNK22HWAHQ?si=NvHl37zE6041pDYB

1:36, 필드 위에서는 강인해 보였던 비니시우스.. 결국 눈물을..


그중 기억나는 응원의 댓글.


"비니시우스 폼 미쳤다!"


모욕적 언사를 듣고 눈물을 쓰게 삼켜야 했지만 비니시우스 선수는 그 후 강력하게 라리가(스페인 프리메라리가)를 비판했다. (브라질 대통령까지 이 사태를 비판하고 나섰다.) 전도가 유망하디유망한 선수가 이유도 없이 인종차별을 당해야 한다니. 태어난 곳과 태어난 피부색은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선택할 수 있었다고 해도 하얀 피부색이 정답도 해답도 아닐 다.



다시 체험관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 댓글을 쓰러 가기 전, 강사인 나는 아이들에게 이런 문장들을 전한다.


1. 나의 댓글이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

2. 누군가는 나의 댓글을 읽는다!


이 문장의 이면에 나는 이런 의도를 담는다.


1. 나의 댓글이 누군가를 살리지 못할 수도 있다. 혹은 살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2. 우리의 댓글은 누군가를 개구리로, 무심코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로 만들 수도 있다.



몇 시간 전 2023 카타르 아시안컵 경기가 있었고, 그 경기는 아쉽게도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의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우승까지 두 걸음이 남았었는데 우리는 한 걸음을 더 내디디지 못한 채 대회의 막을 내려야 했다.


-아쉽다, 화난다, 그것밖에 못 하냐. '졌잘싸'도 아니고. 총체적 난국이다. 전술이 없다.

오늘 기사나 스포츠 영상에는 이보다도 더한 댓글이 달릴 수도 있다. 촌철살인의 댓글도 물론 필요하다. 변화와 성장이 간절시점이긴 하니까.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 아시안컵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아니 영혼까지 갈아 넣으며 운동장을 누볐을 우리 선수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였던 우리의 아시안컵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어느 순간에는, 정말이지 말도 안 되게 행복했다. 우리에게 나락의 맛과 천국의 맛을 동시에 보여 줬던 그 도파민의 순간들. 'K-좀비 축구'라는 별칭까지 얻으며 분투했던 고마운 시간들.


온당한 비판도 좋지만 선수들에게 휴식할 시간은 좀 주었으면 좋겠다. 비판은 며칠 쉬었다 본격적으로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이 순간, 가장 아픈 사람들은 누구일까. 운동장 밖의 우리일까, 운동장 안에서 이제 막 빠져나온 선수들일까.



오늘 스포츠 영상 밑에는 생각보다 많은 댓글이 달릴 것이다.

어떤 댓글을 쓸지,

어느 댓글에 '좋아요'를 누를지,

 

그건 순전히 우리의 선택이다. 선택에는 물론 자유가 있다. 다만 청소년 친구들에게 하던 말을 이곳에도 다시 한번 전하고 싶다.



누군가는 나의 댓글을 읽는다.

나의 댓글이 누군가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


"악성 댓글의 덩치를 불려 주면 이 녀석은 자기 뭐라도 된 줄 알아요. 자신이 정의의 심판이라도 내렸다고 생각하겠죠."



(사진 출처: emmastyles1776@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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