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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Feb 17. 2024

최종화가 주는 위로

the last dance

요즘 신나게 보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 드라마가 하는 날이면 다이어리에 이렇게 적어 놓곤 한다.


'밤에 ○○ 꽃' 보기


사극을 잘 안 보는 편이지만 웃음과 설렘 포인트가 많아서, 또 주인공의 서사가 마음에 들어서 급히 빠져들었다. 주인공이 여자 홍길동의 모습이어서, 아니 성별 빼고라도 그 자체로 영웅호걸다운 모습이 꽤나 멋져 보여서, 우연히 보던 첫 화부터 지금까지 정주행 중이다. (요즘 나의 유튜브 알고리즘에 무작정 등장하여 나의 잠을 한 시간가량 빼앗고 있다.)


그런 드라마가 오늘 끝이 난다. 고작 12부작이라니. 동영상 댓글마다 시즌2 해 주세요, 12부작은 아쉬워요,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간다. 그런 댓글마다 살포시 '좋아요'를 누르며 나도 아쉬움을 달랜다.



최종화. 마지막 회.

어떤 방식으로 끝이 나든 드라마는 끝은 난다. 많은 드라마가 '그래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와 같은 해피엔딩을 향해 달리는 편이고 나 역시 그런 엔딩을 기대하며 최종화를 조용히 기다린다. 끝나고 나면 얼마간은 허전하겠지? 한동안 '널' 잊지 못할 거야, 이런 감상에 젖는다. ('여화'와 '수호'는 세간의 시선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두둥.)


그런데 최종화라고 해서 반드시 엄청나게 재밌는 것은 꼭 아니다. 발단, 전개, 위기, 절정의 시간은 이미 지났기에 '결말'만을 앞둔 그 장면들은, 의외로 싱겁거나 이미 예상 가능한 스토리일 때가 더 많다. 심한 반전은 '절정'의 순간에 이미 써먹은 경우가 대부분.



이쯤에서 드라마 파트너인 엄마와 나의 '드라마 시청 공식'을 공개한다.


1. 막장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전에 아예 손절하기(요즘 우리 어무니는 일일드라마 하나를 완전히 끊었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나.)

2. 재미가 없어도 이왕 보던 거면 그냥 끝까지는 봐 주기(무미건조한 드라마를 보는 일. 이건 좀 고역이지만 이런 시간이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이기에 나는 딴짓을 하더라도 엄마와 나란히 드라마 앞에 앉는다. "말이 안 되네. 좀 재밌게 쓸 수 없나." 이러면서 함께 욕을 하는 게 우리 모녀의 드라마 시청 국룰.)

3. 안 보던 드라마라도 '최종화'라고 하면 갑자기 끝까지 보기



특히 3번의 공식은 암묵적으로 시작한 공식이었다. 요즘은 드라마들이 하도 많아서 어느 날 갑자기 리모컨을 돌리다가 우리 엄마 왈,

"응? 저런 드라마가 있었어? 언제 시작한 거여?"

"엄마, 저 위에 자막 봐. 최종화래."

"보지도 않았는데 마지막 회?"

"응. 마지막이라네. 이제 리모컨 돌린다."

"놔둬. 그냥 마지막 회라니까 봐 주지 뭐."


사실 웬만한 드라마는 마지막에 봐도 그 전개가 얼추 짐작이 간다. 난해한 드라마라 해도 최종화라면 누가 나빴고 누가 착했고, 누가 개과천선할 것인지, 누가 끝까지 반성도 안 할 것인지가 조금 더 자명해진다.


-아, 저 사람이랑 이 사람이랑 헤어졌다가 오늘(마지막 회라) 다시 잘되는 건가 보네.

-아, 예전에 지나가다 잠깐 봤는데 저 사람 죽은 게 아니었네.

-어, 뭐야? 주인공이 1인 2역이었나 봐. 아니면, 뭐 쌍둥이라도 됐나?

-저 사람은 끝까지 1도 반성을 안 하네.


처음부터 쭉 봤다면 짙은 여운이, 최종화만 봤다면 옅은 여운이 남는다. 어찌 되었든 마지막이 여운이 없기란 참 힘들다. 마지막 발걸음을 남기고 떠나는 주인공과 제작진 들이 우리 모녀의 '옅은 안녕'을 눈치챌 리야 없겠지만 우리는 "잘 봤습니다~"라는 말을 일부리 내뱉는다. 혹 시작을 함께하지 못했더라도 최종화만은 격려해 준다. 그건 마치 결혼식은 못 가더라도 장례식은 꼭 가 줘야 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랄까?


"엄마? 빨리 와. 이게 최종화라는데?"

"뭐가? 제목이 뭔데?"

"아, 몰라. 무슨.. 뭐뭐뭐가 뭐뭐뭐, 이런 거라는데? 볼까?"

"그냥 뭐. 잠도 안 오는데 마지막 회니까 봐 주자."

"그래. 만든 사람들 성의도 있으니까."


드라마가 끝나면 드라마 프레임 바깥 표정들 혹은 바깥 사람들이 나오기도 한다. 엔딩 크레딧가 올라가면 그 드라마를 만들려고 안 보이는 곳에서 애썼던 누군가의 흔적들이 마지막 장면 위에서 활자로 진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최종화에는 어떤 활자들이 떠오를까.

우리는 어떤 최종화를 준비해야 할까.


잘 끝났다고, 더할 나위 없었다고, 덜도 말고 더도 말고 이번 생만 같아라, 하며 나의 최종화를 소소히 마무리할 수 있다면, 그 최종화만큼 따듯한 위로는 없을 것 같다.



오늘, 두 달간 나를 뭉근하게 녹였던 드라마가 끝이 난다. 그 결말은 꽤 애잔하고 동시에 달큼하리라. 아쉽지만 끝이 있기에 나는 또 이다음 최종화 시청을 기다리겠지. 묵직했던 지난 시간을 벗고 마지막만큼은 경쾌한 안녕으로 시청자들을 떠나가는 최종화들. 우리의 삶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듯이, 최종화는 제법 간단하고도 명료하게 우리의 미래를 일러 준다. 

끝이 있다는 위로, 주연에서 조연, 조연에서 제작진으로 확대되는 카메라의 숨은 시선들, 그리고 되도록 선명하게 마무리되는 결말.  


최종화는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선명한 위로를 준다.

아마 위로의 마지막 문장은 대부분 아래와 같을 것이다.


"그동안 시청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출처: StarGlade@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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