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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Feb 24. 2024

대보름의 예언

"다시는 안 해."

이것은 예언이 되지 아니하고 매년 엄마를 괴롭힌다. 문제는 엄마 스스로(?) 정한 일이라는 점.


오늘은 정월대보름이자 말날이고 주인공은 된장. 며칠 전 주문해 둔 된장을 장독 안에 소금물과 함께 잘 띄워 놓고 불에 지진 숯과 마른 고추 몇 개를 함께 올려 둔다.

"기도하러 가자."

이건 엄마의 말. (기도요? 갑자기?) 장이 잘되게 해 달라고, 우리는 장독 앞으로 가서 '비나이다, 비나이다'의 심정으로 주모송을 바친다.



"너, 봄봄(=나)이랑 친하게 지내라."

작년이던가. 내 친구의 어무니가 우리 집 된장을 맛보고는 나랑 친하게 지내라고 했단다. (친구 자취 집에 무엇을 가져갈까 고민하다가 엄마표 된장과 고추장을 가져갔더니 친구뿐 아니라, 친구의 어무니께서도 참 좋아하셨다고 한다.) 그해는 유독 된장이 뽀얗고 맛이 좋았다. 시중에 파는 여느 된장보다 빛깔도 맛도 아름다워서, 전국에 자랑하고 싶을 정도였다. 특히나 그때는 우리 쌍둥이 조카가 동참한 '간장 및 된장 담그기' 행사였기에 더 맛있게 잘되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정월대보름을 앞두고 이번 주, 엄마의 허리, 다리, 무릎, 팔목, 손가락들은 바빠도 너무 바빴다. 고사리, 토란대, 취나물, 무나물, 곤드레, 시래기 등의 나물을 삶고 지지고 볶았다. (올해는 힘드셔서 직접 안 말리셨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엄청난 크기의 토란대를 직접 집까지 '질질' 끌고 와 깎고 다듬고 동네 공원에서 말리고... 그땐 정말 난리도 아니었던 정월대보름 준비...)



그런 엄마가 오곡밥 먹는 날이라던 어제, 이렇게 선언하셨다.

"내년엔 안 해, 안 해."

다시는 '그 짓'을 안 하겠다고 선언하신다. (작년에도 들었던 말 같은데...) 게다가 올해는 대청소 바로 정월대보름 음식을 준비하시느라 엄마는, 햄스트링에까지 위기가 왔다. 그러던 엄마가 오늘은 다시,


"근데 하는 건 엄청 힘든데, 맛있긴 진짜 맛있어."


당신이 만드시고도 정말 맛있어서 밥 두 공기를 드신 우리 어무니. 돼지고기 일절 안 드시고, 치킨은 닭 껍질을 왕창 벗겨서 살만 조금 드시는 살코기파 우리 어무니. 나물 드실 때 가장 행복해 보이는 우리 어무니.


순전히 가족들 먹이려고 시작하시는, 엄마의 정월대보름 준비.

내가 미쳤지, 이걸 왜 한다 했을까, 하시며 또다시 나물을 다듬고 잡곡을 사고, 된장을 주문하고 고추장까지 손수 비비는 우리 어무니.



올해의 다짐과 예언이, 내년에는 어떤 정월대보름을 안겨 줄까?

내년에는 힘드실 엄마를 생각해, 엄마를 나의 조수로 앉히고 내가 엄마 자리에서 나물을 무치고 된장을 둥둥 띄워야 하는 걸까? (자신은 없는데 닥치면 다 하... 하겠..지?)


오늘 밤, 정월대보름 앞에서 우리 가족의 '비나이다, 비나이다'가 조용히 이루어지길 바라며,

올해 담근 된장 맛을 벌써 기대해 보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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