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km만 달아났다 올게요
요즘 영혼을 갈아 넣으며 교안을 개발하는 중이다. (프리랜서 강사일을 올해도 계약해 버렸다. 그것이 지난 주의 일이다.) 그런데 그걸 바탕으로 생판 모르는 국어 선생님들 앞에서 다음 주, 100분 시연까지 할 일이 생겨 버렸다. 응? 꼭 해야 하나요?
여기서 대문자 I이자 '아이(사회생활만큼은 아직 어른이 아닌..)'인 나는 어젯밤 우황첨심환을 검색했다. 액상도 있구나. 언제 먹어야 하는 거지? 몇 시간 전에? 1시간? 혹시 부작용은? 복통? 외려 졸음이 쏟아질 수도? 그럼 먹지 말아야 하나. (이거 뭐 술을 먹을 수도 없고요...)
문득 교생 때가 떠오른다. 대학교 4학년. 내가 왜 교육학과를 갔을까, 4학년이 되어서야 자책했다. 자책해서 무엇 하나, 이미 실습할 고등학교에 도착해 버린 나인걸... 모교의 자매 학교쯤인 곳에 가서 나는 두 손 두 발을 오그리며 살았다. 마음이 벌벌 떨렸다. 누군가 내게 형벌을 내리려고 준비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결국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처음으로 나 혼자 교실에 들어가 수업을 시작해야 하는 그날.
그 전날 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눌렸다. 생전 처음이었다. 그것은 오리고 자르는 데 쓰는 줄만 알았지 거기에 내가 눌릴 줄은 미처 몰랐다.
온몸에서 무언가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 몸을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드는 묘령의 기운들.. 먼발치에서 동생이 컴퓨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동생은 나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는 딱딱한 바닥 위 아무 데나 나뒹굴며 잠든 채였고 그 뒤로 오랫동안 영혼이 꽁꽁 묶였는지 몸을 제대로 가눌 수조차 없었다. 외적으로 목소리가 트이지 않으니 내적으로라도 아무나 불러야 했다. 나는 기도밖에 할 게 없었다. 그때 아주 잠시 내 신앙심이 고양되었다.
당일이 왔다. 친구는 내게 신비의 묘약을 건넸다. 자신도 준비해 왔다며... 친구도 소문자와 대문자 사이쯤 되는 I형 인간이었다. 우리는 사약을 먹듯, 줄리엣이 위장된 죽음의 묘약을 먹듯 우황청심환을 들이켰다. 우리의 그날 첫 수업은 어떻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짝 친구와 함께 들이켰던 그때 그 우황청심환은 사실 별 소용이 없었다. 생각보다 크게 떨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다. 어른들 앞에선 떨리는데 이상하게 '그나마' 아이들 앞에선 덜 떨었다. 아니면.. 당시 수업을 듣던 아이들이 내 수업에 큰 관심이 없었던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일기라도 써야 했다.
오늘 아침 일기장에도 철학적인 질문을 죄다 쏟으며 과연 내가 프리랜서 강사 일을 이렇게 계속해도 되는가. 그냥 다른 일만 하면 안 되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세상은 나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질문들로 일기장 바닥을 채웠다. 일기장은 대답이 없었다. 내 인생도 답이 없었고.
"봄봄 선생님, 통화 가능하세요?"
갑자기 전화가 울렸고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라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강의 시연 일정을 받아들이려는 찰나...
"국어 선생님들이 월요일밖에 시간이 안 된다고 하셔서 그날 시간 되시는 다른 선생님이 100분 시연을 해 주시기로 하셨어요. 그날 참관하실 수 있으시면 오셔도 되고요."
대문자 '아이'인 나, 지금 꿈을 꾸나, 이게 현실 맞나?
강의 시연 날짜인 4월 4일까지 (죽음의 '4'자가 두 번 겹친..) 숨도 안 쉬고 체념하며 우울하게 살아야겠구나 싶었다. 자연의 온갖 만물이 회색으로 보였더랬다. 그러나,
"다른 선생님이 하신대요."
이 한마디에 대문자 'I'는 잠깐 숨을 돌려세운다.
물론, 이것이 끝이 아니고 실제로 강의를 진행할 날일 머지않았음을 안다. 예방주사를 맞는 것이 나쁠 것도 없다는 걸 안다.
그런데도 나는... 이 대문자 I는...
갑자기 자연의 만물이 회색빛에서 봄빛으로 화사해지는 것을 천천히 느낀다.
아직은.. 최대한...
도피할 수 있으면 지구 끝까지 우선 도피는 하고 봐야 할 것 같다. (요즘 달리기를 시작하길 잘한 것 같다.)
일기장에 다시 일기를 썼다.
"감사합니다."
일기장이 끝내 답을 주었다. 뭐 아직 내 인생에는 여전히 답은 없지만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