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
"선생님, 질문이 있는데요 마지막 활동에서 12번 체험을 연계한다는 말씀이시지요?"
"아, 네, 네. 제가 좀 부정확하게 썼나 봐요. 생각하신 방향이 맞습니다."
"아녀요아녀요. 확인해 본 거예요."
아차. 또 습관처럼 나온다. '제가 그랬나 봐요'로 시작하는 '내 탓.' 무슨 일이 일어나면 내가 어떻게 했었는지 되돌아보기도 전에 아, 내가 뭔가 잘못했겠구나, 내가 좀 실수했겠구나. 화살을 나에게 돌리는 버릇.
사실 살면서 내가 틀렸던 적이 꽤 있었고 틀린 부분을 지적당한 적도 많았다. 얌전한 고양이가 '실수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는 일이 잦았다. (이 이야기로 흑역사 일지를 써도 연재 브런치북 하나를 다 쓰고도 남을 것이다.) 실수하는 버릇은 '우유부단'이라는 장대한 습관으로도 이어져 나 스스로 내 의견에 '갈팡질팡'이라는 꼬리표를 스스로 매달았다.
"그럴걸요?"
"아마요."
"그런 것 같아요."
이렇게 정확한 답을 회피하려는 버릇이 늘었고. 급기야는,
"친구들아, 곧 태어날 아기 이름 지으려는데 1번, ○○○, 2번은 ○○○. 의견 및 투표 부탁합니다."
친구의 질문에 나는, 2번이 좀 더 좋지만 1번도 이래서 좋네, 라고 말해 버리며 업무와 관련되지 않은 부분에서까지 책임회피 버릇을 이어 가려 했다. 이런 나의 말에 친구는, "아이, 이 사람아, 하나만 딱 골라 달라니까~"라고 내 선택을 아쉬워하였다. 나는 결국 1번도 2번도 선택하지 않은 셈이었다.
이런 '내 탓'과 '부단'의 성격은 장기적으로 내 마음 건강을 좀먹는다. '내 탓 공방'은 스스로 나를 희생양으로 만들거나 소위 '호구'로 만들기도 한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면 남도 나를 믿지 못하는 '갸우뚱'이 늘어가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나를 부르는 소리)
"선생님, 띄어쓰기가 잘못된 것 같아서 그것 하나만 고쳐서 다시 보냅니다."
"아, 네, 네. 제가 좀 부정확하게 썼나 봐요. 생각하신 방향이..."
앗, 이건 내가 맞았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서너 번이고 다시 들여다보고 또다시 들여다본 후,
"이건 붙여 쓰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조심스럽게 의견을 다시 타진한다.
내가 맞았을 때도 어딘가 나를 미심쩍어하는 나;;
그래도 조금씩 '갸우뚱' 수치를 줄여 가야겠다.
나를 위해서도 나를 둘러싼 세상을 위해서도 말이다.
(급하게 휘리릭 우당탕탕 써 보는 오늘의 '매일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