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행여 타지에서 외로울까 봐 '엄청난 부지런함'을 발휘하여 일주일에 두세 통씩 편지를 부치곤 했다. 나는 늘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쪽이었다. 대개는 답장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때만큼은 동생도 내게 답장을 해 주었다. 나는 손 편지, 동생은 이메일로.
공부를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들어온 동생이 캐리어에서 육중한 부피로 무언가를 꺼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동생에게 보낸 내 편지들이었다. 언니가 쓴 것이니 무거워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낑낑대며 그것을 굳이 다 챙겨 왔던 것이다.
그러나 동생이 시집을 가면서까지 챙겨 갔던 나의 편지가 돌고 돌아 우리 집 붙박이장으로 돌아왔다. 과거의 내가 '반송'이 된 것이다! 동생은 누군가 써 준 편지를 다시 들춰 보며 감상에 빠질 성격은 아니었고, 나와 달리 정리와 정돈에 일가견이 있는 터라 내 편지들이 좀 거추장스러웠을 것이다. 게다가 동생의 배려도 있었다. 자기 언니가 글 쓰는 것을 좋아하니 '언니의 글'을 되돌려 주겠다는 큰 뜻을 품었던 것. (굳이 '반송'에 좋은 의미를 부여해 본다.) 나 역시내게 온 편지들이 무작정반가웠다, 마치과거의 내가 다시 나에게 편지를 보낸 것처럼.
그런 편지를 아주 오래 그냥 묵혀만 두었다. 이리 치우고 저리 치우며 이사만 하게 했다. 그러다 오늘 다시 나의 눈에 들어온 이 편지들. 고것들을 보니 직접 우체국으로 가 두세 통씩, 혹은 대여섯 통씩, 그간 써 놓았던 편지를 한꺼번에 부치던 옛 시절의 내 발걸음들이 떠오른다. 동생을 걱정하며 동시에 나의 이십 대를 걱정하던 시절의 발걸음들. 그 발걸음들엔 아직 희망이, 기쁨이, 즐거움이, 약간의 불안만큼이나 기대가 있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동생은 그 시절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편지들도 무사히 귀국했다.
살면서 '무사'가 다행인 순간들이 제법 많다. 늘 힘이 되어 주는 쪽은 동생이었는데, 그때만큼은 내가 잠시 '힘이 되어 주는 쪽'에 서 있었던 것 같다. 잘하는 것 하나 없지만 '편지 쓰기'만큼은 질리지도 물리지도 않았던 과거의 나에게 감사를 전한다. (긴 문장, 긴 호흡으로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