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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May 27. 2024

심심한 거리, 그 거리가 딱 좋다

지켜보고 싶은 친구들이 생긴 어느 날

처음엔 이 녀석만을 보았다.

녀석이 퀑퀑(?) 꿩꿩(?) 소리를 내고 있었다.

"흐업! 장끼인가 봐!! 꿩! 꿩!!"


얼른 렌즈를 잡아당겼다. 사실 태어나 처음 만나는 장끼였다! (물론 작년에 이미 까투리를 만나 보았다. 자연 다큐에 진심이신 우리 아버지가 까투리라고 알려 주셔서 알게 되었다. 까투리를 처음 봤을 때는 아주 몸집 큰 산비둘기 같아 보였다.)


조용히 숨죽이고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장끼가 웬 미키마우스 모양의 머리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익숙한 등은 누규?



흐업! 한 번 더 입틀막+동공확대!의 순간이었다.

동그라미 두 개로 보였던 그 머리띠가 서서히 고개를 들자...


라니라니 고라니였다!



작년 11월, 달리기를 하는데 누군가 바스락거리며 옆에서 달리고 있었다. 돌아보니 고라니. 폴짝폴짝 멋진 점프 실력으로 저 멀리 산속으로 사라지던 그때 그 고라니가 아닐까, 싶어 괜스레 반가웠다. (물론 이 친구는 다른 고라니일 가능성도 높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 고라니는 농작물에 해를 주는 동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라니 서식 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 한반도. 어느 다큐에서 보니 고라니가 영어로는 water deer였다. 어머, 물사슴! 이라니~ 영어 이름이 없는 내가 보기에, 우리 라니의 영어 이름, 좀 멋진걸?


아무튼 반가웠다. 두 종류의 생명체를 동시에 만나다니. 꿩 보려다 고라니까지 본 상황이니, 이것이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의 상황인가? (앗, 꿩 앞에서 꿩 먹는다는 속담을 꺼내다니 좀 미안스럽구먼..)


게다가 그 두 생명체는 매우... 심드렁하고도 그 나름 친밀해 보였다. 서로를 바라보다 말다 관심 없다 말다를 반복. (고라니 송곳니 길이로 보아 꿩도 라니도 모두 수컷으로 추정.)



서로의 영역에 어느 간섭도 터치도 없는 듯한 저 무해한 거리. 무해한 네 개의 눈동자들.


라니는 장끼의 뒤에서 오로지 풀 뜯기에만 열중한다. 장끼는 우리 인간들의 부산스러움을 눈치채고도 고개만 까딱. 고고한 옆모습을 드러내며 나의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 그런데 그건 마치,

"찍을 테면 찍으슈."

초상권을 허락한 듯한 제스처였다(고 우겨 본다.)



장끼와 라니의 심심한 거리.

서로가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에 아무렇지 않게 오래고 그 자리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풍경이 되어 줄 수 있는 거리.


최애, 애착○○, 절친, 베스트, 온리원, 바늘 가는 데 실 간다...

이런 말들에서 보듯 아주 긴밀한 거리로 인간관계를 구성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런데 지금껏 살아오며 느낀 것은...


저들처럼 심심한 거리를 유지하는 일. 그러면서도 함께 한 공간을 누리는 일. 조용히 공존하며 서로의 먹이에, 서로의 하루에 관대해 보는 일.


그런 무해하고도 관대한 거리를 지니는 건

꽤 근사한 관계인 것만 같다.

그게 꿩과 라니의 우정.

꿩의 사전에 나온 우정의 뜻풀이가 아닐까.



다음에 또 두 친구를 만나게 되면

그땐 한 번 더 물어봐야지.

"너희 친구니?"


응, 이라고 해도

아니, 라고 해도 좋다.


이미 두 친구들은 내게 친구 이상이 되어 주고 있으니까. 

(나도 이쯤에 서서 심심한 거리를 유지하며 너희들을 지켜보고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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