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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Jun 10. 2024

나무가 죽었다

매번 걷던 길에서 사지를 잃은 나무가 내 발길을 잡아 가둔다.

'너 어디 갔어? 어제까지 여기 있었잖아?'

지나치며 슬쩍 볼 때만 해도 꽤 멀쩡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


딱히 너를 미워했던 것은 아닐 텐데.

딱히 네가 이 비좁은 길의 방해꾼이 되었던 것도 아닐 텐데.


어디 병이라도 들어서 그런 걸까.


너를 심을 땐 너의 최후를 가늠하지 않고 무작정 너를 여기 옮겨 와 심었을 텐데.

그래도 처음엔 누구라도 네가 잘 자라길 바랐을 텐데.


이제 너는 광합성을 못 하니 곧 뿌리마저 숨을 다해 버릴 정인 걸까.

아니면 맹아(萌芽), 새로 돋아나는 싹이라도 다시 있어 주면 밑동에서라도 무언가 자라나려나.



팔다리가 묶인 채로 하루하루를 사는 느낌일 때가 있다.

내가 하는 일이 내가 아니고 내가 하고 있지만 이것이 내 일이 아닌 듯하고.

그러하지만 이런 메마름 혹은 과습들을 견디다 보면 언젠가 잎이 나고 꽃을 피우겠지, 하며 산다. 그것이 비록 내가 원하던 꽃이 아닐지라도.


그런데 묶인 팔다리가 봉인이 해제된 후에도 이 나무처럼 덜컥 밑동만 남긴 채 잘려 나간다면...

그 삶은 퍽 허무하지 않을까. 밑동만 남아 버린 삶이라니.



오래 자란 나무들 틈새에서 방심하고 있던 이 흔한 나무는... (아마도 나무가 많은 우리 동네에서 아주 작은 엑스트라쯤이었던 그저 그런 이 나무1은.. 혹은 나무365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최후가 대개 그런 것이듯 어쩌면 이 엑스트라 나무의 최후도 별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의 조연, 엑스트라인 내 삶도 마찬가지고.)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나를 책장 앞으로 무작정 데려다 놓는다.



식물을 죽이고 죽이는 사람이라 화분조차 아예 키우지 않는 나는 이 밑동을 보고 나서인지 갑자기 '식물'과 관련된 '인지' 및 '인식'이 생겨 버려 식물 관련 책을 빌리고 식물의 표지를 하고 있던 책들을 집 안 책장에서 기어이 찾아낸다.


그리고 내 방 옆에 붙은 베란다를 무심코 바라보다..

내년쯤엔 이곳을 작은 정원으로 만들어 볼까.

말도 안 되는 결심이 의심처럼 피어오른다.

(누구를 또 밑동으로 만들려고?)



아무튼 이번 주는 이 책들과 잠시라도 살아 봐야겠다.

이것이 내가 나무를 애도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내가 내 하루를 애도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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