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조카 중독자의 항변

아직도라뇨?

by 봄책장봄먼지

#1

"우리 혀니, 무슨 생각해?"

"이모 섕가악(생각)~"

꺄악갸아악. 이러니 내가 못 끊는다, 조카중독.



#2

"오, 우리 호니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 사랑해요, 호니."

"이모오, 어.. 할 말이 있어 갖꼬요."


"우리 호니 뭐라고? 잘 안 들려요. 사랑해요, 호니."

"어어. 어.. 말할 게 있어서요."


"아, 네네. 말씀해 주세요. 사랑해요, 호니."

"이모."


"네네. 사랑해요, 호니."

"이모호. 사랑해요, 이모."

(하악하아악. 이래서 내가 또 못 끊는다, 이놈의 조카중독증.)


"나도요, 나도요. 나도 엄청 엄청 사랑해요, 호니."

"네. 또 봐요."


"네네. 또 또 봐요, 사랑해요 호니."

"네에엣."


눈치챘겠지만 나는 단단히 걸려들었다. 조카라는 늪에 허우적대기를 5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채 조카들, 그것도 쌍둥이 조카에게 내 모든 사랑을 자진하여 헌납하고 있다. 나는 아무도 못 말리는 조카중독자다.




<조카중독자의 중독 현상>


1. 조카와 대화할 때 내가 발화하는 문장의 어미는 죄다 '사랑해요, 호니(혀니)'이다.

(참고로 내가 발화하는 문장의 끄트머리에 '사랑해요 호니, 사랑해요 혀니'라고 말하는 부분은 조카만 보면 나타나는 이 훈이모의 자동어미이다. 귀여운 쌍둥이 조카를 볼 때면 이 자동어미가 뇌를 거치지 않고 바로 발사된다.)

*훈이모=봄책장봄먼지(이름에 '훈'이 들어가서)



2. 거의 백수에 가까운 쥐꼬리 용돈벌이로 살아가면서도 백화점만 가면 6층 유아아동 코너에 꼭 들른다. (물론 요새는 들르기만 하고 구입은 못 한다마는..)

한창 조카 선물에 맛 들였을 때 일이다. 바람막이 점퍼 두 개를 구입하던 중 자신이 고모라는 젊은 직원이 이리 말한다.

"제가 고모인데요, 제 조카의 이모는 월급의 70퍼센트를 조카에게 들이붓는 것 같더라고요. 아우, 그쪽 이모는 정말 못 당하겠더라고요."

훗. 자신이 고모라는 점원의 말을 들으며, 나는 조금쯤 이모들을 대표해서 암, 그렇고 말고 고모랑 이모랑 맞짱 뜨면 당연히 이모 압승이지. 의문의 1승을 저 혼자 좋아라 한다.



3. 대폰 속 플레이리스트는 죄다 만화 주제곡이 점령했다.

출처: 음악사이트 bugs

조카님들께서 요청하실 때 바로 틀어 주려고 조카님들 최애 노래들은 항상 재생목록 상단으로!





4. 아기를 낳아 본 적 없건만 휴대폰에 아기 사진만 가득하다.

"저장공간이 부족합니다."

휴대폰이 늘 내게 하는 말. 그렇게 조카들을 찍어대더니.




5. 조카들과 같이 보던 만화를 이제는 내가 더 재밌게 본다.

"이모는 옴파로스의 비밀이 더 재밌는데. 그거 보자."

"아냐. '달나라를 구해 줘' 볼 거야. 토끼 나오는 거!"

조카와 벌써부터 리모컨 경쟁이 필요하다.





자, 그럼 요즘 부쩍 나타나는 이모의 금단현상도 짚어 보자.





<조카중독자의 금단현상>


1. 지나가는 다섯 살만 봐도 쌍둥이 조카를 떠올린다.

나도 다섯 살짜리 친구들 있는데! 나도 나도 다섯 살이 귀엽다는 거 엄청 잘 아는데!! 나도 조카 있따아~!! 여러분, 저도 조카 있어요~!! 이런 마음으로 귀가하다가 '아, 집에 가는 길에 동생네 들러서 우리 집 다섯 살 꼬마들 얼굴 보고 갈까?'라고 자동으로 생각한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다섯 살 정도의 어린이 목격'이 조건 자극이 되어 '보고 싶음(침)'이 조건반응으로 줄줄 흘러나온다.)



2. 하루 이틀만 안 봐도 손톱을 깨물며 그리워한다.

'지금 우리 둥이들 뭐 하지? 어린이집 갔을 시간인가? 아, 키즈노트 봐야겠다. 아, 오늘 견학 갔구먼?'

이렇게 이모는 조카 스토커가 되어 간다.



3. 밤마다 아침마다 점심마다, 아, 그러고 보니 시도 때도 없이 조카 동영상을 돌려 본다. (휴대폰에 '완소 동영상' 폴더가 따로 있다.)



4. 전과 달리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과 공정한 재판에 민감하다.

어린 쌍둥이는 뭐든 같은 분량, 같은 속도가 필요하다. 그런 쌍둥이 조카를 닮아서인지 일상생활에서도 똑같이 나눠 주는 일에 예민하게 군다. 특히 먹을 것에 유독 공정을 외친다.



5. 친구들에게 자식 자랑(?)을 한다.

-크크. 우리 아가들도 그래. 한 녀석이 응가 마려울 때 다른 한 녀석도 응가한다고 나한테 화장실 가자더라니까.

-우리 아가? 너 아가 없잖아.

-아, 맞다. 크크크.

-암튼 너희 조카 엄청 예쁘더라. 잘생겼어, 잘생겼어.


*누가 내 칭찬을 하면 의심을 하지만 누가 내 조카들 칭찬을 하면 방심을 한다. 마음이 무장해제가 된다.






친구가 어느 날 묻는다.



"아직도 그렇게 조카들이 귀여워?"

"응? 너 방금 뭐라 그랬어? 아직도? 아직도라니?"


귀여운 나이여야만 귀여운 거 아니고

귀여운 얼굴이어야만 귀여운 건 아니다.

(아, 물론 우리 조카들 정말 무쟈게 귀엽다. 이건 이모의 빈말이다,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내 주변 사람들 가운데 서른몇 명에게서 '너희 조카 너무 예쁘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표본이 확실?하고 오차의 염려도 붙들어 매시라.)



글 쓰다 말고 조카들 귀여운 표정이 떠올라 잠시 옆길로 샜다. 아무튼 사람들은 말한다. 아직도 그렇게 조카가 귀엽냐고, 아직도 그렇게 제 할 일도 못 챙기면서 조카 사랑에 목매냐고.



그럼 나는 이렇게 답한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아직도라뇨?저는 아직도,



이모 콩깍지 깐 콩깍지 안 깐 콩깍지
안 깐 콩깍지 깐 꽁 깍지...




이모의 조카중독은 이렇게 늘 '아직도 콩깍지'다.





*혀니: 쌍둥이 첫째 조카

*호니: 쌍둥이 둘째 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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