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책장봄먼지 Jun 14. 2024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내 하루의 후기

제작진 눈치 vs 관객 눈치

대를 내려왔다. 아무도 나의 무대를 궁금해하지는 않았다. 오로지 나 혼자만이 뻘뻘 땀을 흘렸다. '끝'이 왔다는 것이 이렇게 반가운 소식일 수 있다니. 나는 두 개의 무대를 마치고 그제야 숨을 크게 돌렸다. '아, 끝났다.' 누가 보면 엄청난 무대를 꾸린 줄 알겠지만 고작 해서 100분 체험 두 개, 곧 200분의 체험식 강의를 마친 것에 불과하긴 하다. 그런데도 이것을 준비하기 위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억지로 걸친 채 구멍 나고 뜯겨 버린 구석구석을 꿰매고 깁느라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계속해서 나를 닦달했다. 실패하면 안 돼... 넘어져서도 안 돼.. 망치면 안 돼...


문득 나 나름대로의 큰일(?)을 마치고 보니 실제 공연에 서는 가수와 관객, 스텝의 삼박자가 궁금하다. 공연과 전시관 체험이 같을 수야 없겠지만 내게도 무대(체험 강의)의 접수를 받고 날짜와 시간을 조정하고 모든 기기 설비를 철두철미하게 준비하며 내 수업을 물심양면 지원하는 제작진이 있다. 오늘도 원만한 진행을 위해 장비를 옮기고 진행 상황을 체크하며 보이는 곳에서,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무대를 함께 빛냈다.


하지만 사실 작년까지는 제작진의 '입김'에 휘둘렸다. 작은 입김에도 휘청거렸다. 무대(강의)를 하기에는 다소(?) 형편없는 나의 실력 때문에 제작진도 실망하고 스스로도 절망했던 시간이었다. 때로는 조언을 받았고 때때로 지적을 받았다. 가끔은 나의 못난 점이 들통난 것만 같아 괴로움에 뒤척이기도 했다. 나라는 사람이 부끄러워지는 강의이자 무대였다. (이런 여러 상황들이 빚어낸 이야기가 나의 독립출판물 내용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 다시 한번 가수와 관객을 생각한다.

가수가 스텝들 신경 쓰느라 관객에게 노래를 제대로 들려주지 못했다?


그게 말이 되나? 결국 무대에 남는 건 무대 위 가수와 무대를 채우는 관객뿐이다. 이 둘이 모여 하나의 무대를 만든다. 공연이 시작되는 순간, 제작진이란 이름은 지워진다. 프레임 밖 사람들 소리는 관객들의 함성 소리, 노랫소리에 묻히고 만다. 온에어. 빨간불이 들어오면 무대 뒤편의 눈을 의식하느라 어버버할 필요도, 해서도 아니 된다.  


'의식'하는 순간 무대는 어그러진다. 그저 무대에서는 '물 흐르듯'이라는 말처럼 그저 '흘러가는 물'이 되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관객과 뒤섞이고 그들에게 녹아들어야 한다. 제작진은 잊어야 한다. 지금은 '무대 뒤'보다 '무대 앞'이 중요하다. 무대를 기획하고 설치한 제작진이 백번 천 번 고맙지만 내 무대를 보러 와 준 눈앞의 관객들, 그들이 사실 이 무대의 주인공이다. 내가 웃음과 감동을 주어야 할 유일한 대상이자 이 무대의 주체.


무대 위에 선 나는 관객과 신명 나게 놀면 된다. 그뿐인 것이다. 그 100분의 시간만큼은 나와 그들만 남는다. 꼬투리는 무대가 끝나고 나서 생각해 보아도 충분하다.


 

마음이 부대끼고 까지고 깨지려 할 때마다 오늘의 무대를 떠올리려 한다.

누가 내 공연을 100분(分)이나 봐 주러 오겠는가?

100분 동안 나와 눈을 마주친 쉰두 명의 아이들. 그들의 모든 100분이 모여 나의 무대가 되었다.


그들이 있는 한, 관객이 있는 한...

나도 나의 무대를 언젠가는 제대로 넘어서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축하 공연은 처음이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