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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Aug 21. 2024

생활의 발견

전기의 발견

신데렐라도 아닌데 12시 즈음...


딸깍.

우리 집은 마법이 풀린다. 전기라는 마법.


누가 강제로 우리의 세상을 일시에 내려 버린다. 후드득 찾아온 어둠에 놀란 우리.


-전기 나갔나 봐?!

-우리 집만 그런가?


서둘러 밖으로 나가 본다.

우리 집만 그렇다. 우리가 문제다.


-관리 사무소죠? 여기 몇 동 몇 호인데요, 저희가 전기가 나갔어요.

-두꺼비집 작은 스위치를 먼저 다 내려 보세요. 그리고 전체 큰 스위치 올리시고요.

-안 올라가요.


강제로  올리려 해도 자동으로 우리 손을 끌어내리는 스위치. 절대 올리지 말라는 단단히 경고처럼 느껴진다.


-저기... 와서 한번 봐 주실 수 없나요?

-저희는 그 일 안 해요.


지난번 아파트에서는 이것저것 디 손봐 주었지만 몇 해 전 이사 온 이곳은 단지가 적어서인지 어쩐지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 일이 많다.


-관련된 업체 전화번호 혹시 없을까요?

-잠깐만요. 근데 인터넷 검색해서 하면 되는데...


그래도 알려 준 전화번호를 잘 적어 둔다.


-아침에 전화해야겠다.

-그래. 급해도 일요일 밤에 전화하는 건 좀 아니지.

전기가 우리 세상에서 잠들어 버리자 되레 우리 인간은 짐이 확 깨 버린다.

 


-아, 얼음 사러 가자!

-아하 냉장고 때문에?

우리는 편의점에 가서 컵에 담긴 얼음을 13개나 사 온다. 물 2리터도 잊지 않는다. 내일 아침은 가스 불에 데운 물로 누룽지를 먹을 예정.


-아, 아이스크림 먹자!

-그래, 이왕 녹을 거 지금 먹어 버리자.

선풍기도 켤 수 없는, 촛불 두 개의 어두운 밤. 우리 가족은 촛불 앞에서 결연히 녹아가는 아이스크림을 달게 먹는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도 할짝할짝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다음 날 아침.


-두꺼비집이 낡아서 그래요.

오래된 아파트, 그리고 두꺼비집에 적힌 로고는 ..goldstar... (LG의 전신이었던.. 기억하시나요? 추억의 골드스타를??)


그런데 전기를 고치러 와 준 분께서 갑자기 신세계를 제안하신다.

-엇? 110 볼트를 그냥 다 막아 놓았네. 지금 못 쓰고 있죠, 콘센트?

방 여기저기를 둘러보시더니 방마다 막혀 있는 110V 뚜껑을 보고 안타까워하신다.

-중요한 곳마다 다 막혀 있었네? 이거 220V로 바꾸셔요. 내가 돈 벌려는 게 아니고 이거 못 쓰면 불편해서 그래. 두꺼비집 고치는 데 12만 원, 이거 110V를 220으로 바꾸는 데 8만 원.

-아, 다 합쳐서 20만 원이요?

-네.

-바꿔 주세요. 진짜 불편했었어요. 완전 멀티탭 끌고 다니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4년 동안 콘센트 기근에 시달렸다. 방마다 콘센트를 (거의) 하나씩만 쓰려니 불편했다. 2.5m 혹은 3m 멀티탭들을 질질 끌고 다녀야 했다. 그런데 이걸 이렇게나 쉽게 고칠 수 있었다고?




구멍 하나당 8,000원. 열 개의 구멍을 뚫었다..! 마침내.. 우리는 220V의 세계로 건너왔다. 알렐루야~ 관세음보살~~



그날 저녁.

우리 집은 전기가 뚫린 기념으로 삼겹살 파티를 했다. 꽉 막혀 있던 구멍에 전기가 흐르고 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유선 청소기를 사용하는 우리 집은, 이제 청소부터 아주 수월해질 예정이고 멀티탭이 필요가 없어질 예정이다. 문명의 이기가 이렇게 황홀할 수가!

(아버지 왈, "구멍이 10개나 뚫렸으니 우리 집 미래도 이제 뻥뻥 훤히 뚫릴 일만 남았다.")


황홀한 전기의 추억.

전기의 소중함을 곱씹을 수 있었던 하루였다.


"전기 님, 무지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사라지지 마시고 잘 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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