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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Nov 25. 2024

월요일의 자연

자연을 보려거든 월요일을 이용해 보세요.



우리 집에서 2분 거리에 있는 생태 공원. 그 공원은 상당히 부지가 넓을 뿐 아니라, 한쪽으로는 동산으로 이어지고, 다른 한쪽으로는 커다란 산으로 이어진다. 동물들을 만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천혜의 명당자리다.


그날도 어김없이 산책길에 나섰다.

-어? 어치다!



물까치 크기의 어치. 의외로 몸집이 커서 눈에 잘 뜨이지만 좀체 자주 볼 수 없는 종류이다. 민가까지 내려오는 물까치나 산까치와 달리 주로 산속에서 마주쳤던 어치. 그런데 요즘 웬일로 자주 눈에 뜨인다. 겨울로 접어드는 계절이라 먹이를 구하러 오나 보다. (까치 스토킹에 이어 이번엔 어치 스토킹 중...)


"어치, 뭐 하니?" 줌을 당겨 보니 식사 중이다.

어치가 상수리 혹은 도토리로 추정되는 먹이를 열심히 깨부수고 있다.

(동영상 29초쯤엔 '그 나름' 명장면도 나온다.)



월요일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다. 동물들도 그 사실을 아는 듯하다. 월요일, 오랜만에 이 녀석의 소리와 마주쳤다.


-엄마, 무슨 소리지, 이거?

-무슨 소리?

나만 들었나 보다. 사람은 없는데 저 아래 분명 낙엽 밟는 소리가 서걱서걱 들린다. 이건 사람들의 운동화 소리가 결코 아니다. 작년에 한 번 들어 본 소리이기도 하다. (작년 11월, 달리기를 하다가 냇가에서 무언가 낙엽 밟는 소리가 들렸는데 사람 발자국 소리 같지가 않았다. 옆을 돌아보니 글쎄! 녀석이 세상 밝은 뒷모습을 보이며 폴짝폴짝 뛰어가는 게 아닌가? 석, 그렇게 자유로워 보일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그런 소리였다, 바로바로...!


고라니 낙엽 밟는 소리.


두 다리가 밟는 리듬이 아니었다. 이건 네 다리로 걷는 소리야... 낙엽 위에 맨몸을 부딪는 소리... 나는 눈에 불을 켰다. 귀를 쫑긋했다.

-앗, 저기 라니다, 고라니!

되도록 작은 소리로 외쳤다. 어무니와 아부지는 나의 손가락을 따라 급히 시선을 옮겼다.

-안 보이는데?

-저기, 저기!

-아, 그러네. 오, 뛴다.

개울가 쪽으로 내려오는 듯싶더니 사람들을 목격했는지 방향을 틀어 다시 산으로 오른다. 성급한 발걸음으로 우당탕퉁탕 내리막을 내려오는 한 마리. 그러더니 엉덩이를 씰룩이며 산속으로 폴딱폴딱 뛰어들어 사라진다.


어찌나 잽싼지 모른다. 카메라를 는 순간 이내 사라져 버리는 속도이므로 고라니를 만날 때는 그저 바라만 봐야 한다. 그래야 그 움직임을 마음껏 목격한다. 시야에서 사라져 아쉬워하고 있는데 또다시 동산 위에 움직임이 보인다.

-어마, 저기 동산에 두 마리!

그림자가 보인다. 마리가 아니었구나. 겨울을 함께 동료가 있다니 왠지 안심이다. 앙상해진 겨울 나뭇가지 사이로 그림자놀이를 하듯 두 생명체의 팔딱임이 보인다. 고라니를 본 흥분도 잠시...



월요일은 정말 뭐가 되어도 되는 날이다. 공원 중턱에 올라 하늘을 올려다보니 이번엔 참매다.


어머, 참매다!

이번엔 참매다. 우리 산에는 참매가 산다고 들었다. (그런데 정확히 저 새가 그 참매인지는 잘 모르겠다. 독수리처럼 날긴 하는데 아버지의 주장으로는 참매란다. 워낙 높이 날아서 우리 인간이 새를 내려다볼 수는 없으니 날갯짓과 뱃가죽을 멀리서 보고 짐작만 할 뿐이다.) 아무튼 상공을 가르는 모습만큼은 장관이다. 찰나의 에어쇼를 안기고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는 참매.


-이야. 오늘 계 탔다. 자연 계!

어머, 오늘은 어치도 보고 고라니도 보고 참매도 보고! 우리는 연신 감탄한다. 자연과 연결된 곳에서 살고 있으니 저절로 치유를 받는 기분이다. 이래서 월요일에 일이 없으면 꼭 여길 오고 싶더라! 그런데 이게 웬일? 자연의 행운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월요일 자연'의 화룡점정은 바로...


꿔꿔. 꿔꿔꿔.


-엥? 이거 뭐지?

-꿩 울음소리.

자연 다큐 전문가, 아버지의 한마디.

-오 맞다, 맞다.

-저기 어딘가 있나 보다.

좀 멀리서 들리긴 하지만 분명 꿩의 소리. 맞은편 동산을 바라다봤다. 어디 있는지 보이지는 않지만 소리만은 쩌렁하다. 사람들이 별로 없으니 아주 당당하게 꿩꿩거리는 우리의 꿩. 장끼일까, 까투리일까, 저 녀석? 성별을 추측하려는데 점점 소리가 급해지고 또렷해진다. 응? 뭐지?


꿔꿔꿔꿔꿔꿔꿔꿔꿔꿔꿔꿔꿔꿔


-응? 꽤 가까이 들리는데?

그때 우리가 앉아 있는 벤치 중턱을 향해 갑자기 장끼가 날아든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도약과 착지라 내 마음은 혼비백산이다.

-어머어머. 장끼 날았어!

-그럼. 그래도 장끼 잘 날아.

-난 거위처럼 거의 못 나는 줄.

-저번에 다큐멘터리에도 나왔잖아, 꿩 나는 거.

-아, 맞다, 맞다. 그때 날더라, 꿩도!

뒤늦게 다큐멘터리에서 본 꿩의 비상이 언뜻 기억이 난다. 화려한 문양을 자랑하는 장끼가 꽁지를 휘날리며 우리의 눈앞으로 휘리릭 지나쳐 동산 너머로 쉬이 사라진다. 

대체 월요일의 자연, 얼마나 다채로운 걸까. 사람이 줄어드니 동물이 자꾸만 자유를 찾는다.



이렇게 월요일의 자연은 많은 소리를 들려준다.

어치, 도토리 깨는 소리

고라니, 낙엽 밟는 소리.

참매, 창공을 가르는 소리.

장끼, 퍼드덕 중턱을 날아오르는 소리.

(거기다가 새끼 고양이 밥 먹으러 나오는 발자국 소리까지.)


자연을 빌려 쓰는 인간들. 월세도 안 내고 '자연세'도 안 내고 편히 이용만 한다. 동물들은 겨우 일주일에 한두 번쯤. 인적이 뜸한 월요일을 틈타 이 생태 공원에 나타난다. 조금 허락된 자유지만 마음껏 소리 내어 울고 웃고 날아오른다.



월요일에만 허락되는 자연의 시.

오늘은 어치, 고라니, 참매, 장끼가 그려 주고 말아 준 시로, 하루가 참 풍성하고 풍요로웠다.


자연에게,

이렇게 알게 모르게 진 빚을,

언제쯤에나 갚을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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