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이 일어나는 순간.
오래되고 낡은 이모에게 다가오는 작은 기적 같은 순간.
순간은 짧다. '순간'들에는 발이 달렸다. 순식간이다. 알게 모르게 다녀갈 때도 있고, 아, 그 순간이구나, 라고 문득 느낄 때도 있다. 내겐 그제 밤의 순간이 그러했다.
-30분 후에 그 집에 가도 되나요? 우리 집엔 '도라에몽: 진구와 철인군단'이 없어서요.
갑작스레 나타난 문자. 우리한테 온다고? 무조건 '대환영 이모티콘'을 보낸다. 그런데 응? 철인군단? 그게 뭐였지? 아, 맞다. 몇 년 전에 쌍둥이 조카와 함께 보았던 만화 영화. B-tv에는 해당 영화가 없다면서 밤늦은 시간 우리 집에 오겠다고 한다, 순전히 영화 관람을 위해.
그들의 방문 예고는 늘 이모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 요즘 자주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귀한 분들인데 귀한 얼굴을 영접할 수 있다니! 조금 전까지 어슴푸레하던 마음들이 다시 갓밝이 아침인 것처럼 깨끗이 맑아진다. (우리 집이 kt-지니 tv인 것이 새삼 다행스럽다.)
-밤늦게 영화 보러 오셨네요, 내일 학교도 가야 하는데?
-목욕 다 하고 영화 보러 왔어요. 영화 보고 집에 가서 잠만 자면 돼요.
-근데 영화 보는데 뭐 먹을거리는 안 줘도 되남?
-네. 물 챙겨 왔어요.
쌍둥 어미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조카들은 tv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몇 년 전에 한 번 본 영화지만 문득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무작정 '할머니집 영화관'을 찾아온 쌍둥이 조카. (할머니네 영화관은 모니터가 크지 않지만 조카들은 크게 괘념치 않는 모습이다. 원하던 영화, 철인군단을 볼 수만 있다면야.)
-이모, 이거 기억나?
-분명 봤는데도 기억이 안 나네. 배경음악이 엄청 좋아서 계속 찾아들었던 건 기억나.
그리고 눈물이 줄줄 났던 것도 기억한다. 조카들하고 놀아서인지 원래 어린이 감성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만화 영화를 보고도 동화책을 보고도 우는 이모다.
영화가 시작하자 조카들은 조용하다. 어른들이 슬며시 대화를 나누면 "어, 안 들려요. 조용히 좀 해 주실래요?" 영화관 예의를 지켜 달라는 듯 정중하고도 단도직입적인 부탁이 들린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영화 초입, 뭔 내용인지 모르겠다며 안방으로 들어간다. 안방에는 조금 망가진 tv이지만 다른 tv가 한 대 더 있다. 그것으로 일일연속극을 시청하시기로. 이제 해당 영화에 집중하는 것은 조카1과 조카2, 그리고 이모, 이렇게 셋뿐이다.
재밌어? 묻지 않는다. 관람을 방해하지 않기로 한다. 이미 조카들 표정에서 즐거움이 읽힌다. 때론 해맑고 때때로 심각하다.
나는 조카들과 함께할 때면 그 순간을 두 눈에서 놓치지 않으려 한다. 예전에는 '조카 육아'를 하며 다른 일을 병행하려 애썼다. 무언가 그냥 흐르는 듯한 시간이 아까웠다. 하지만 그건 어리석었다. 그 순간들은 그리 길지 않다. 지금 함께 앉아 있는 이 순간도 그리 길지만은 않을 것이다. 영화는 1시간 48분이지만 이 순간은 내 인생의 여러 장면 가운데 아주 작은 순간일 것이고, 그 작은 순간의 기적을 함부로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일상의 기적은 자주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조용히 맞아들이고 조용히 이 순간을 감상하면 된다. 그뿐이다. 그렇게 아주 몰입하여 장면마다 함께 웃고 함께 소리친다. (그리고 또 기어이 눈물이 나서 조카1에게 들키고 만다.)
영화는 전쟁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우정을 다룬다. '친구'를 모르던 로봇이 '친구'라는 이름을 가만히 느낀다. 이모인 나도 이 순간, 가만히 이 '친구들'을 느낀다. 영화를 보다가도 친구들의 눈과 귀, 손짓과 몸짓에 집중한다. '마음'이라는 카메라로 녀석들을 깊이 새기기로 한다. 시간이 흐르면 지금의 이 빛은 자연스레 바래겠지만, 이 순간들이 내뿜는 빛은 내 마음 안에서 영원할 것이다. 순간이 영원이 되는 기적이, 이 '친구들(조카들)'을 만나기만 하면 생긴다. 거참, 신기하다.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순간이다.
그것이 시간이라 해도 나의 모든 것이라 해도, 심지어 나의 목숨이든 심장이든 무엇이라 해도,
희한하게도 티끌 하나 아깝지 않다. 혹시 이런 마음도 기적일까?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
누군가를 사랑하면 저절로 생기는 순간.
기적이 방문하는 그 순간.
나는 가만히 그 기적을 사랑한다.
다른 것은 할 수 없다.
크리스마스 이이브에 나타난 기적 앞에서,
나는 조용히 기적의 손을 잡고 기적의 눈을 맞춘다.
그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해야 할 일은 없다.
그저 사랑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