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습격
#4_피의 습격
"뭐, 뭐야? 이거 피야?"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너의 피. 이대로 봄보미의 시간은 끝인가. 하다 하다 피다. 봄보미는 숨을 크게 들이켠다. 자, 생각을 하자 생각을... (너 그래도 생각은 할 줄 아는 인간이잖아?)
'왜 그런 걸까. 대체 저 물건은 또 뭐고?'
봄보미는 하얀 변기에 번지는 빨간 물감을 멀거니 바라본다. 녀석은 어디 출신일까. 소장이나 대장 같은 장에서 나왔나, 자궁에서 나왔나, 방광에서 나왔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피부에서 떨어져 나온? 너 혹시 치질? 봄보미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저 뭐가 저리 빨갛나 싶다.
봄보미의 상반신은 조직검사 이슈로 요즘 가뜩이나 심란하다. 그런데 그 심란함에 더해 혼란까지 보태 주는 하반신이다. 이번 달 1일부터 건강을 보류한다는 종이의 습격을 받았다. 종이에 적힌 말 몇 마디가, 그리고 저기 저 변기에 보이는 저 핏방울들 몇 개가 봄보미에겐 어쩐지 좀 잔인하다.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그런데 저것이 자궁에서 나온 것이라면 말이 안 된다. 봄보미는 이미 열흘 전에 달거리를 치른 후이다. 그렇다면 정녕 너는 누구냐? 이거 이거 좀 더 배출을 해 봐야 정체를 더 알 것 같은데...
새벽, 요의를 느껴 억지로 끌려 나온 봄보미의 몸뚱어리다. 눈을 반쯤 감고 나온 길이지만 피를 본 눈은 핏발이 설 지경이다. 갑자기 온몸이 말똥말똥하다. 제 아무리 '대책 없는 낙천 DNA'라 해도 이대로 다시 이불 속에 들어갈 만큼 낙천적이지는 못한가 보다. (점점 '낙천 DNA'가 '비관 DNA'에게 자리를 내어주려 든다.)
"생리 주기가 평소 규칙적이셨나요?"
어느새 의사 앞의 봄보미.
"네."
"최근엔 언제였나요"
"열흘 전이요. 선생님, 혹시 이거 폐경인가요?"
봄보미는 차라리 이것이길 바란다. 또 다른 질병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노환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편이 낫겠다.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 더 좋겠다. 그래도 그것은 자연의 순리이지 않는가. 봄보미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첫 달거리를 시작했다. 마침표가 찍힐 때가 됐을지도 모른다. 40세 이전의 폐경이 조기 폐경이므로, 봄보미 나이라면 '조기'라는 말이 빠진다. 그러니 폐경, 이쪽이 내 피의 원인인 편이 낫겠다.
"그건 아닐 거예요. 폐경 전에 한참 생리가 없거나 불규칙적이거나 그렇거든요."
"아, 그렇구나."
(폐경이라 하기엔 그간 꽤 규칙적이었다.)
"그럼 환자분, 요새 갑자기 살이 빠졌다거나 하신 적은 없으세요?"
"(제 몸을 보세요 선생님) 아니요."
"아니면 밥맛을 잃었다거나..."
"(다른 건 다 잃어버려도 그건 잃지도 잊지도 않네요, 선생님) 아니요."
"스트레스를 받으신 일은?"
1일부터 건강을 돌보라는 종이의 습격을 받긴 했다. 그래도 그게 피를 볼 만큼의 스트레스였을까?
"아, 그건 잘 모르겠어요. 딱히..."
"그럼 혹시 최근에 주사 맞은 적 있으신가요?"
"주사요? 흠... 없는 것 같은데요? 아, 최근 수면 내시경은 했어요."
"그건 상관없어요."
"그 외에 다른 건강검진 같은 것도 하긴 했는데."
"그것도 상관없고요. 주사 맞은 적은 없으시다는 말씀이죠?"
있었나 없었나 어째 기억이 잘 안 난다. 없었지 않았을까.
"없었어요."
"그럼 우선 더 살펴봅시다."
한참을 살피던 의사는 봄보미의 자궁 안에 피가 많다고 말한다. 그 말투 끝에는 걱정스러운 억양이 덧붙는다.
"우선 지혈제를 처방해 드릴게요."
원인을 제대로 찾지 못해 처방약만을 간신히 얻어 나온다.
'그래, 밥 먹고 얼른 이 약들을 모조리 먹어 주겠어!'
다시는 피를 보지 말자는 다짐을 하듯, 가슴속 깊숙이 약봉지를 품는 봄보미다.
'아이고, 배야.. 배가 왜 이래.'
그런데 그날 밤, 봄보미 하체가 갑자기 후들거린다. 특별히 차갑거나 기름진 음식을 먹은 것도 아닌데 자꾸 배가 너무 아프다. 아, 왜 이러지? 흡.. 잠, 잠깐. 화장실이 봄보미를 또 부르네... (자꾸 널 보자는데?)
'가만, 좀 이상한데? 이렇게나 배가 아프다고?'
봄보미는 약봉지를 도로 찾아 약 이름을 확인하다 말고 문득 약사의 한마디를 떠올린다.
"부작용 적힌 종이도 여기 함께 담았어요."
부작용? 그래, 맞다. 약사가 종이를 따로 챙겨 주었던 것이 기억난다. 봄보미는 장이 뒤 틀리는 느낌을 안고 그제야 종이를 확인한다.
부작용: 구토, 설사, 고열.
'응, 설,,, 설사?'
내일 직장을 가야 하는 봄보미다. 피를 택할지 지혈제를 택할지... 고민도 아깝다. 돈은 벌어야지... 아, 어쩐지 자꾸 잔인하기만 한 이번 달.
'잠깐. 부, 부작용?'
부작용 하니까 문득 아침에 만난 질문이 떠오른다. "환자분, 혹시 주사 맞으신 적은 없고요?"
주사? 주사 부작용? 혹시 그거?? 미치겠다. 어떻게 그게 기억이 안 나지? 누가 봄보미 뇌세포를 톡 건드린 다. 일렬로 수놓았던 주사 네 방이 불현듯 떠오른다.
"선생님, 제가 바보 같이 열흘 전에 주사 맞은 걸 깜빡했어요."
"아, 그러셨구나. 그럼 그냥 전화로 물어보셔도 되는데."
"아, 그렇구나."
비가 억수로 오던 날이었다. 다 젖은 치마 아랫단을 여미며 다시 묻는다.
"부작용 맞나요?"
"정형외과에서 주사 맞고 간혹 생리불순이 나타나시는 분들이 있어요."
"안 그래도 어젯밤에 갑자기 생각나서, 저도 막 찾아보니까 부작용에 그런 증상도 있더라고요."
"이거, 한 달 가는 사람도 있어요."
"눼? 한 달이나요?"
한 달 내내 빨간 피라니,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봄보미는 지난달, 어깨가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목이 안 돌아갈 정도였고 오른쪽 어깨 통증이, 평생 살며 만난 근육통 가운데 최고점을 찍었다. 정상을 정복해 버린 통증이라면 주사를 맞아야 하는 게 아닐까? 보름 내내 그냥 버티기만 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정형외과를 찾은 길이었다. 평소라면 절대 수용하지 않았을 주사였다. 말 그대로 '부작용'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싶었다. 스테로이드가 들어 있는 주사 아니던가.
'이런 AB...씨'
봄보미는 갑자기 억울하다. 목디스크 초기라면서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주사를 손쉽게 권하던 병원에 뭔가 억울하고, 그걸 또 바로 맞은 자신의 선택이 억울하고, 그렇게 아프면 맞아야 하지 않겠냐고 말해 준 가족들의 조언이 억울하고, 그걸 또 맞았다고 해서 바로 부작용이 나타나는 자신의 몸이 억울하다.
"참, 지혈제가 부작용이 있으셨다고요."
"네. 너무 배가 아팠어요. 막 쏟아서.."
그거 계속 먹다가는 직장에 가기도 전에 화장실에서 미리 실신할 듯요.
"그럼 세 끼니마다 드시지는 말고 아침, 저녁. 이렇게 두 번만 드셔 보세요. 지혈을 하긴 해야 하거든요."
"아, 네."
그 자리에선 고분고분 '네'라고 말해 놓고, 봄보미, 그 뒤로는 지혈제를 먹지 않았다. 실시간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직업이라 봄보미는 자리를 비울 수가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유방외과에서 향후 처치를 받기로 하였는데 주의 사항에 '지혈제 복용 금지'가 쓰여 있었다. (줄줄이 뭔가가 자꾸 어긋나기만 하는 9월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
'하, 이제는 피까지 보는 인생이네.'
피의 습격으로 전쟁 같은 일주일을 보낸 봄보미.
그래도 피를 보고 원인을 파악하는, '아는 게 힘이다' 쪽이 더 나으려나, 피를 안 보고 원인도 결과도 모르는, '모르는 게 약이다' 쪽이 나으려나.
며칠 뒤면 가슴에 주삿바늘을 찔러 피를 또 봐야 한다. 피의 외출 빈도가 좀 더 잦아질 수도 있겠다.
아무래도, 피의 습격에 점점 익숙해져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