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의 습격
#3_숫자의 습격
세상 다 산 사람처럼, 혹은 세상 다 안 살아도 되는 사람처럼 제법 호기롭게 '여한죽(죽어도 여한이 없다) 리스트'를 작성하던 지난날의 봄보미. 제법 잘 자고 일어난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듯한 싸한 느낌에 뒤를 돌아다본다. 화들짝 봄보미를 놀라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검색, 그래, 검색을 해 보자. 아니 계산기 앱부터 켜야 하나?"
맘모톰 시술. 더 정확히는 진공 보조 유방종양 절제술, VABE 시술. 봄보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검색을 시도한다. '응? 헉? 아니야, 이게 아닐 수도 있어. 내가 초음파를 하고 온 병원에 직접 들어가 보자.' 병원 누리집에는 친절히도 액수를 정확히 공개해 놓았다. 1.5cm 이상이면..? 응? 150? 백오, 뭐, 뭐? 하나에? 혹 하나에? (돈이 안 벌릴 땐 한 달 150도 힘든 달이 있는데 응? 백오십?)
화들짝 봄보미를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숫자였다. 숫자가 나타나자 봄보미 주변이 일순간 어두워진다. 수명이라는 숫자는 줄어들 수 있어도 병원비라는 숫자는 늘어나는 법밖에 모른다. 갑자기 '여한죽 리스트'의 스텝이 꼬이기 시작한다. (이제 여한죽 리스트는 죽 쑤는 리스트가 되는 것인가.)
그래... 돈이 들어간다. 왜 그걸 생각도 못 했을까. 통증은 바로 숫자다. 다름 아닌 돈이라는 숫자.
봄보미는 그간 평화로웠다.
"저에게서 이 잔을 거두워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하느님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어느 잔이든 마실 준비가 됐다고 호언장담을 하며 여한죽 리스트를 작성했건만 갑자기 퉤퉤퉤, 잔을 쏟아 버린다. 자신의 통증이 본인 한 사람에게서 끝나면 천만다행이지만 혹 이야기의 규모가 커져 가족에게까지 손을 벌리게 되면? 그건 천하의 민폐다. 민폐는 폐해다. 잘못하면 재해다, 인간재해.
'일단 조직검사를 3개 받기로 했으니까 크기별로 따져서 420, 많으면 450, 병원에 입원도 해야 하나? 그 3개만 제거하면 되려나? 근데 또 제거만으로 안 되면, 대체 돈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드는 거지?'
봄보미는 그제야 시름이 깊어진다. 사실 그간 정신이 몽롱했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조직검사라고?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MBTI가 T였다면 더 이성적으로 이 현실을 받아들였으려나? 여한이 없으니 이만하면 됐다고 구름 위를 걷듯 '내가 더 살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작성하던 봄보미였다. 그러나 구름 위에서 내려와 땅바닥에 착지하고 보니 그건 그냥 구름이 아니었다. 먹구름이었다, 먼지가 잔뜩 낀 데다가 시퍼렇게 잿빛 멍이 든.
물론 맘모톰이야 지금의 봄보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최선의 결과일 수도 있다. 악성이 아니어서 미리 제거하자는 차원일 테니까. (아직은 결과를 모르지만 말이다.) 그것만으로 감사해야 할 일이 될 터다. 살려는 드릴게, 라고 말하는데 시술이든 수술이든 감지덕지할 일일 게다. 그래도, 그래도... 이렇게까지 갑자기 구멍이 생긴다고? 내 가슴에 혹을 제거해 구멍이 생기면 어느새 새살이 달려와 그 구멍을 메워 준다지만, 돈으로 줄줄 새는 호주머니 구멍은, 대체, 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막아 주지? (봄보미에겐 콩쥐처럼 구멍 난 독을 막아 줄 두꺼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누수는 대체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매달 봄보미를 따라다니던 카드 대금이라는 숫자? 아니면 취준생이자 수험생으로 보낸 7년이라는 숫자? 통장 잔고에 착실히 숫자를 쌓지 못해 수줍게 찍히던 그 자그마하던 숫자?
뒷감당이 만만치 않을 누수의 숫자들. 거기다가 혹여, 만일, 만약, 만에 하나, 백만에 하나 다시 큰 병원에 가야만 한다면...
"조직검사하고 악성이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해요?"
"여기 말고 큰 병원에 가시면 돼요."
무심코 내뱉은 질문에 가벼운 정답이 돌아온다. 큰 병원이라... 봄보미는 그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불안과 두려움의 크기를 미리 가늠해 본다. 그 두려움은 아마 카드 영수증에 커다란 숫자로 찍힐 것이다. 심지어 400~500 사이라는 고민은 고민도 아니게 될 수도 있다. 여기서 '0'이 더 붙는 사태까지 가서는 안 된다. 그때는 '여한죽 리스트'가 아니라 그냥 '죽기 전에 해야 할 리스트'로 방향을 선회해해야 할는지도 모르지. 그러니 희희낙락하게 '여한죽 리스트'나 작성할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몸과 마음 구석구석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T(Thinking)들을 끌어모아야 한다. (봄보미는 INFP다.) 이성의 끝을 붙잡고 존재 자체가 민폐가 되지 않게끔 정신을 차려야 한다.
"친구야, 우리 이번 주 만나는 거 맞지?"
정신을 차리던 도중 문자가 온다. 봄보미는 그제야 친구와의 약속이 떠오른다.
"응. 어디서 볼까? 나 벌써 수다 목록 왕창 적어 뒀잖아."
"왕창? 근데 무슨 일 있어? 걱정되는구먼."
걱정되는구먼, 이라는 친구의 글자에 마음이 급히 덜컹거린다. 일부러 킬킬거리며 자신을 최대한 달래던 시간들이 한꺼번에 녹아내릴 듯한 기분이다. 어서, 가족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던 이 불안을 자신의 입 밖으로 내보내고만 싶다.
"친구, 나 이럴 바에는 콱."
"콰악?"
"아니야. 그냥 그렇다고. 참, 요즘 드라마에서 병에 걸린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냐? 근데 거기서 치료 막 안 받겠다고 그러는 거 보면 옛날엔 이상했거든?"
"근데?"
"가족들이 자기 걱정하는 건 생각 안 하고 왜 돈 들어갈 걱정부터 하나 싶었는데 지금은 아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건강하기만이라도 해야지."
"건강하기만이라도 하는 게, 정말 주변 사람들을 크게 배려하는 일이었고, 최대한 예의를 지키는 일이었더라. 건강이 달아나면 먼저 가족들한테 무례해져. 아프니까 괜히 짜증도 내고.. 게다가 자기 때문에 돈이 들고 고생이 들고... 가족들이 환자라는 짐까지 들어야 할까 봐... 생각만으로도 벌써 민폐다, 민폐."
"그래도 살아야지.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지. 살아야지, 살고 봐야지."
지금은 문제가 아닌데 나중에 그것이 큰 문제로 자라날까 봐 봄보미는 이 문제가 어렵기만 하다.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풀이 과정을 모조리 잊은 사람이 되어 버린다.
"만일 결과가 안 좋으면 안 살아야지, 싶기도 해. 나만 아프면 되는데 가족들 주머니까지 아프게 만들면... 뭐 이런 생각들이 다, 괜히 미리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일이긴 한데... 아무튼 그렇게 해서까지 사는 게 정말 맞을까?"
이미 '연명치료중단 카드'까지 발급받은 봄보미다. 봄보미는 마음 통하는 친구 앞에서 갑자기 한없이 나약한 어린양이 되어 어리광을 부리고 엄살을 피운다.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되고 싶은 걸까, 봄보미?
"이런 일로 얻을 건 결국 글 하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요즘은 글쓰기도 손에 안 잡혀, 마음에도 안 잡혀."
봄보미의 친구는 그런 봄보미를 조용히 바라본다. 괜찮을 거야, 라는 뻔한 위로 대신(물론 그 뻔한 위로도 봄보미는 사랑한다.) 봄보미가 적어 간 '수다목록(이 목록의 다른 이름은 '불안목록'이리라.)' 가운데 서른다섯 번째 항목까지 여태 들어 놓고도 더 이야기를 하라고 봄보미를 채근한다. 내가 다 들어 주겠다고, 36번은 또 뭐냐고 봄보미에게 계속해서 묻는다.
친구가 눈앞에서 두 눈을 맞추어 주고 있다. 괜찮을 거야, 라는 눈빛이다. 불자(佛子)인 친구는 말 대신 눈으로 이야기한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괜찮아, 괜찮아. 봄보미는 부처님 같은 친구의 온화한 눈길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손목에 찬 묵주를 굴리며 응답한다.
그렇게 부처님의 미소를 보내 준 친구에게 온통 두려움을 꺼내 보이며 잠시 숫자를 억누르고 집에 돌아오는 길. 한 번 더 두려움을 붙들어 줄 물건으로 '책'을 택한다. (제목은 《간단후쿠》 , 위안부 이야기)
"17,000원이요."
숫자가 인생을 습격할 참인데 봄보미는 자신의 인생에서 17,000을 꺼내 쓴다. 이렇게 숫자들을 마구 세상에 꺼내 쓸 처지가 아니긴 한데.
'살아야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때 친구의 목소리가 새로 산 소설의 책장 사아사이로 조용히 퍼져 나간다. 아멘.
통증 뒤에 오는 것은 숫자들의 기습이다. 봄보미는 1, 2, 3, 4, 5... 한 쪽 한 쪽을 넘어가며 계속해서 다음 페이지에 들어선다. 숫자의 압력에서 김이 빠져나가길, 숨통이 다시 자신에게 틈을 주길, 봄보미는 불안의 수치에 마이너스 기호를 애써 덧대며 끝까지 이 책을 계속해서 넘기기로 한다.
아직 다음 장이 기다린다.
어떤 숫자, 어떤 페이지에 도착할지는 여전히 모르지만.
(사진 출처: susan-holt-simpson-GQ327RPuxhI-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