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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입력하세요1

종이의 습격

by 봄책장봄먼지

#1_종이의 습격


봄보미가 브런치에 오랜만에 글을 쓰려는데 제목 쓰는 난에 '제목을 입력하세요.'


가만... 나한테 제목이 있었던가. 봄보미는 문득 회상에 잠긴다. 특히나 9월 한 달간 봄보미의 삶에선 '제목'이란 것들이 사라졌다. 제목을 붙일 수 없이 막막했던 날들이었다. 정확히는 9월 1일, 이 종이를 받아 든 순간부터다.


국소부위 음영이 보임. 판단 보류.

이 서류를 받자마자 봄보미는 '여한'이란 말을 떠올렸다. 이루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한 것과 이루고자 하지 않았지만 아직 이뤄야 할 것들이 뭐가 있을까.


"유방 초음파 예약을 하고 싶은데요."

종이를 받아 들고 '초음파'라는, 어찌 보면 외계인이 쏘아 댈 것만 같은 레이저 같은 초현실적 낱말을 한참 곱씹는다. 여름에 건강검진을 해서 여름부터 미리 불안해진 것일까. 인생이야 늘 불안했는데 굳이 긁어서 부스럼을 파고 파고 파묘해 버린 것은 아닐까.


봄보미에게 8월은 직업상 '거의 쉬어 가는' 한 달이다. (말이 좋아 '쉬어 가는'이지 그 말이라는 포장지를 뜯어 제치면 '거의 굶어 가는' 혹은 '거의 돈을 벌지 못하는'이란 말들과 함께 봄보미의 멋쩍은 알맹이가 드러난다.) 봄보미는 떠밀리듯 연말에 건강검진을 하지 않으려 8월에 이곳저곳을 점검받는다. 조금의 긴장을 한 스푼 얹지만 별다른 일이야 있겠어? 그러나 동시에 봄보미는 이유도 없이 간절해진다. 절대적인 인정 욕구가 샘솟는다. 누구로부터의 인정 욕구인지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조금 더 살아도 된다는 신의 뜻'에게서 받는 인정? 봄보미 몸에게 '신의 인정'은 게임 속 '최종 보스' 같은 것이다. 무찔러야 하는 대상인 동시에 무참히 나가떨어질지 모르는... 그런데...


"조직 검사를 해야 합니다."


이런... 최종 보스에게 당했다. 1차 가격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봄보미는 생각이란 것을 했다. (사실 봄보미는 그간 생각 없이 '낙천적인 깡'으로만 살아온 감이 없지 않았다. 가령, 내년에 뭐 먹고살지, 도 생각하기 아득해서 내일 뭐 해야 하지,도 일부러 잊고 사는 녀석이다.) 봄보미는 자꾸 생각이란 것을 했다. '나에게 조직은 목적 달성을 위한 사회 집단 같은 것밖에 없었는데... 인간의 몸도 곧 조직이구나, 세포들이 아우성치는...'


조직이란 말을 몸에 깊이 새긴 후에야 비로소 봄보미는 자신의 몸이 보이고 그제야 자신의 현실이 보이고 결국 자신의 비루함을 눈치챈다.


'난 아직 아프면 안 돼.'

누군들 아파야 하겠는가, 모두가 아프지 않고 세상이 함께 손을 마주 잡고 쎄쎄쎄 하며 즐거이 뛰노는 소풍 같은 세상이길 꿈꾼다. 하지만 여전히 봄보미는, 가족들 앞에서 태연한 척 가장을 한 뒤 속으로는 생각한다. 아직 아니야, 적어도 아직은.


이제 슬슬 시작할 나이인 건가..?

봄보미는, 이거 뭐, 내 몸을 두고 체육대회라도 열린 건가 싶었다. 삶보다는 죽음 쪽에서 나를 좀 더 끌어당기는가 싶었던 거다. 어느 쪽 줄다리기가 나를 놓고 승리를 가져갈까. 헝겊이 묶인 줄의 한가운데 서서 이쪽저쪽을 아슬아슬하게 관망한다. 그러다 별안간 봄보미 손가락이 인터넷을 누르고, 공연히 '유방 조직 검사'를 쳐 댄다. 화면 가득 '조직 검사'에 습격당했다는 사람들의 증언이 쏟아진다. '조직 검사'라는 말을 듣자마자 정신없이 울며불며 살았다는 이야기, 주사가 아팠다는 이야기, 차분히 상황을 설명하다 글의 맺음말에 이르러 마음이 분열되는 듯한 이야기... 문득문득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은 사람들의 두려움이 읽힌다. 그럼 만약, 내가 이것에 관해 글을 쓴다면 나는 어떤 이야기를 쓰게 될까.


"이 주 뒤로 예약 잡아 드릴까요?"


봄보미는 고개를 끄덕이나 마른 두 입술에선 쉽사리 '네'라는 말이 터져 나오지 못한다. '이 주 뒤'라는 말은 마치 선고 같다.


불현듯 종이 한 장이 봄보미를 습격한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공격이라 봄보미는 선 채로 고꾸라진다.


(사진 출처: jon-tyson-VBnrJHa74UU-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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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