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습격
기적의 가격은 얼마일까.
"500만 원입니다. 뭘로 결제하실 거예요?"
"카드요. 저기, 카드 두 개로 결제해도 되죠?"
"네. 일시불이요?"
"아니 각 3개월씩이요."
건조한 응대를 받고 나온다. 그래, 이대로 당분간 이곳과 끝이면 좋을 것이다. 물론 그건 '기적', 그이의 마음에 달렸을 터다. 기적은 한 번에 오지 않는다. 일주일의 유예 기간을 선택한다. 봄보미는 병원에 입원하던 어제 아침으로 시곗바늘을 슬며시 돌려 본다.
"최종 조직 검사 결과는 일주일 후에 나와요. 드물게 악성인 경우도 있어요. 자, 여기 사인, 네, 그리고 '들었음' 적어 주시고요."
1박 2일 입원을 준비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은 지도 어언 한 달 하고도 열흘. 드디어 그날이 다가왔다. 자, 짐은 다 챙겼고... 속옷, 세면도구, 여벌 옷, 수면 양말, 개인 물컵 그리고...
"아니, 1박밖에 안 하는데 책을 두 권씩이나 가져가?"
"아, 한 권은 시집이니까 가벼워."
(평소 시집을 읽지도 않는 봄보미인데) 병원에 가서 시술을 받고 입원을 하게 되면 왠지 마음이 싱숭생숭 '시(詩) 기분'이 될 것만 같다. 읽을지 안 읽을지도 모르면서 시집과 소설책 한 권씩을 가방에 욱여넣는다. (이 소설책은 한 달 전부터 '1박 2일 입원 때 읽을 책'으로 지정해 두고 아껴 두었던 책이다.)
어디 피란 가는 사람처럼 짐을 두 덩이나 마련해 놓고, 일요일 밤. 긴장도 기대도 않은 채 침대에 누워 말똥말똥, 네 개 혹을 전체 다 제거한다는데 그러고 나면 봄보미의 기분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생각보다 통증이 오래가서 일상이 헝클어지게 될까. 봄보미는 다가올 주사의 고통, 마취 후의 고통을 떠올리며 미리미리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고통의 가격과 기적의 가격이 그래도, 제법 닮아 있길 바라며...
아니, 가만히 생각해 보면 기적을 기다리기만 할 일도 아니다. 봄보미는 잠이 오지 않는 김에 마음속으로 급히 기적을 찾아 나선다. 그래, 봄보미, 알고 보면 기적투성이에 둘러싸여 살고 있지. 2025년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도 기적이다. 세상에는 이런 맘모톰 시술만으로도 혹을 제거해 주는 기술이 있고 기기가 있다. 그리고 이를 실제 실행하는 병원들이 있고 의사가 있고 이 시술을 열심히 준비하는 간호사들까지 있다. 시술 전에는 전해질 수액을 놓아준다고 한다. 시술 중에는 국소 마취를 할 마취제가 있다. 시술 후에는 염증 등에서 안전해지라고 압박 붕대와 압박 찜질기를 준다. 그리고 병원에는 입원실이 있고, 봄보미라는 환자는 그곳에서 1박을 하며 통증을 달랠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6인실에 들어가기로 했는데 봄보미는 당일, 3인실로 배정된다. 심지어 구석진 곳이며 조명도 따로 쓸 수 있어 개인 병실 못지않은 느낌이 든다.)
어디 그것뿐인가. 입원 내내 옆에서 짐을 들어 주는 사람, 말동무와 염려를 동시에 건네주는 내 사람, 봄보미 엄마가 있다. 시술실 바깥에는 함께 기도 중인 아버지도 봄보미 곁에 있다. 거기다 때마침 일이 없다는 동생이 봄보미를 병원까지 데려다준단다. "퇴원 때도 데리러 올게. 전화해 줘." 차로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니. 봄보미는 차가 없지만 주변에는 차가 있는 동생이 있다. 기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런 연락도 보내온다.
봄보미를 걱정한다며 시술 전 문자를 보내 주고 시술 후 영상 통화까지 해 주는 빛 같은 존재들. 봄보미에게는 이미 기적이나 다름없는 쌍둥이 조카들도 있다. 존재 자체가 기적인 이들이 기적 같은 문자로 봄보미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세상에나... 이 모든 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
이렇듯 당연하고도 사소한 일상들이 모여 봄보미는 시술대 위에 오른다. 시대와 장소와 사람들을 기가 막히게 잘 만난 덕에 미리 검진을 하고 건강을 깊이 챙겨 본다. 살아 있다는 흔적은 종종 살아간다는 기적이 된다. 일상의 기적이 봄보미의 1박 2일을 아름답게 가격(加擊)한다. 그 가격의 펀치가 오늘만큼은 아프지가 않다. 그 가격은 가치를 매길 수도, 가격(價格)을 따질 필요도 없다. 오늘의 기적은 봄보미 혼자만 이룬 기적들이 아니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아프리카 속담에 이런 속담이 있다는데, 알고 보니 아이를 키우는 데만 필요한 속담이 아니었다. 한 어른이, 한 사람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려면 '온 마을이, 온 세상이, 온 지구의 힘'이 필요한가 보다.
미세히 쌓아 온 인류의 성과와 기적들이 봄보미의 작은 몸체 안으로 모인다. 시술 후에는 두 가슴을 심히 압박하는 뾰족하고도 찌릿찌릿한 통증들이 찾아오겠지. 그 통증을 짓누르며, 봄보미는 눈앞의 자기 사람들을 본다. 기적을 찾아 헤맨 봄보미... 결국 그녀도, 파랑새의 목적지를 알고 있다. 기적은 이미 오래전 '봄보미'라는 역을 종착지로 설정해 두었다. 오랜 기다림 후에야, 조금 아프고 나서야 결국 그 하나의 사실을 깨닫는다.
"어머, 피멍이 좀 많이 들으셨네요. 그동안 찌릿하거나 좀 아프거나 하지는 않으셨고요?"
시술 후 일주일 동안 포비돈 스틱으로 상처 부위를 소독했다. (상처 부위는 스테이플러로 집어 둔 탓에 더더욱 조심스러웠다.) 물이 닿으면 안 된다고 하여 커다란 특대 김장비닐 속에 몸을 욱여넣고 구멍 세 개를 뚫은 후 머리를 숙이고 팔 두 개만 구멍 밖으로 뺀 채 샤워를 했다. (이로 인해 목디스크 통증을 추가되었다.)
"이젠 소독 안 하셔도 돼요. 오늘은 절개 부위를 본드로 붙여 드릴 건데 손으로 떼지는 마셔요. 나중에 하얗게 변하더라도 그냥 자연스레 없어져요. 실리칸 밴드도 더는 안 붙이셔도 되고 이제 오늘부터 샤워도 자유롭게 하셔도 돼요. 그래도 수영이나 골프, 헬스 같은 운동은 당분간 삼가셔야 해요. 그리고..."
다행히, 네 개 혹 모두 괜찮았어요.
괜찮다
「1」 별로 나쁘지 않고 보통 이상이다.
「2」 ((‘-어도’ 따위와 함께 쓰여)) 탈이나 문제, 걱정이 되거나 꺼릴 것이 없다.
기적의 단어를 일주일 만에 수집한 봄보미. 그 한마디로 기어코 봄보미도 기적의 대열에 합류한다. 네 개 혹 가운데 하나는 성질이 좀 나빴던 모양인데 제거하길 잘했다고, 이번에 제거한 네 개 혹들 말고 다른 애들도 있으니 추적 관찰은 하자고, 혹이 제거된 곳 말고 다른 곳에 혹이 또 자랄 수도 있으니 6개월 후에 오라고, 혹이 떠나고 남은 텅 빈 자리는 조직끼리 그 구멍을 서로 메우면서 따끔거릴 거라고, 멍은 1~2주면 사라질 거라고.
혹을 보내고 네 개의 구멍과 피멍을 가슴에 기적처럼 받아 들고 봄보미는 6개월 동안 다시 '일상'을, 즉 '기적'을 누리라는 통보를 받는다.
"축하를 부탁드립니다."
그간 아무 이유 없이 봄보미를 사랑해 주고 기도해 준 사람들에게 전화를 건다. 이번엔 기적의 기도 대신 당당히 축하를 부탁한다.
"오, 정말? 축하축하."
"어이쿠, 축하드립니다!"
가족들은 또 한 번 봄보미의 기적이 되어 준다. 이 겨울의 기적. 생일이 겨울인 봄보미는 이렇게 또다시 기적의 탄생을 맛본다. (아니, 어쩌면 기적은 셀프일지 모르겠다. 그리고 기적은 사랑과 동의어였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 발로 봄보미 앞에 도착한 기적을 고이 쥐고서 조심조심 일상을 펼친다.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이 기적들을 이젠 주변에 기꺼이 나눠 주고 싶다.
봄보미는 이미 기적이었다.
지금까지 이 어설픈 연재를 읽고서 '좋아요'를 눌러 주신 몇몇 분들께,
봄보미의 '기적 출산 과정'을 같이 지켜봐 주신 그 모든 분께 감사를 올린다.
그분들의 삶 속에도 기적의 순간들이 빛의 속도로 도착하기를, 깊이깊이 간절히 바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