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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습격

by 봄책장봄먼지

#8_여행의 습격


유럽 여행 한 번 못 가 봤는데.


이건 봄보미 목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봄보미 모친의 입에서 갑자기 잉태된 소리다. 조직 검사를 하고 나오던 날이었다. 병원 문을 열고 나오며 봄보미가 내뱉은 '여한죽(죽어도 여한이 없다) 리스트'를 듣고는 봄보미 모친이 이렇게 응답한 것이다. '여행 한번 제대로 못 가 봤는데.'

이건 봄보미 모친 본인 이야기가 아니다. 문장의 목적어, 즉 대상은 봄보미. 세상을 작게만 보고 죽으면 그게 제대로 사는 거냐는 이야기였을까. 봄보미가 장난 삼아 던진 '여한죽 리스트'에 봄보미 모친은 농담 대신 진담으로 응수한다.

(죽더라도) 여행 한번은 제대로 해 보고 죽어야 사는 것도 사는 것답다는 이야기였을까. 봄보미 모친은 봄보미를 측은히 여긴다. (그런 엄마를, 봄보미 역시 똑같은 이유로 측은히 여긴다. 딸 잘못 만나 호강 한 번 실컷 못 해 보시네.)

"엄마, 나 그래도 일본 여행은 다녀왔잖아. 그것도 두 번이나! 일본은 해외 아닌가, 뭐?"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 비슷하게 생긴 건물들이 있는 동북아 말고 '여행' 하면 떠오르는 그런 곳. 이국적인 로망 비슷비슷한 그런 것. 왠지 같은 빵을 먹어도 파리 빵이 더 낭만적일 것 같고, 같은 골목을 걸어도 스페인의 골목골목이 시상(詩想)을 떠오르게 만들 것만 같은 그런 곳. 그곳에 엄마와 우뚝 서서 흘러 들어오는 해와 흘러 나가는 해를 번갈아 구경하며, 폴짝폴짝 유럽의 하루를 함께 거닐 날. 과연 봄보미 모녀에게도 그런 날이 올까? 와 줄까? (봄보미는 이런 생각을 하다 말고 갑자기 지갑을 챙겨 나선다. 그래, 답은 이거다. 로또나 사러 가야겠다.)


그런 모녀가 지금, 여행은 고사하고 병원 앞이었던 것.

"여길, 애 낳으러 오거나 아니면, 애 낳고서 와야 하는데 크큭."

산부인과와 산후조리원 간판들이 나부끼는 건물 옆을 지나며, 가슴을 돌돌 만 압박 붕대 때문에 '여행 한번 제대로 가 보지 못한 압박'까지 느끼는 봄보미다.

"여길 그냥 유방 조직검사나 하러 오네요..잉?"

늘 봄보미가 엄마의 보호자 노릇을 했었는데 그날만큼은 전세가 잠시 역전되었다. 봄보미 가방을 들고 있는 사람이 이번엔 봄보미 모친이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건 '뼈도 없고 실도 없는 실없는 농담'뿐이 아닐까!

"큭. 대학병원에선 그동안 내가 이리저리 모시고 다녔는데 오늘은 엄마가 내 보호자네? 내가 비서를 했던 턱을 오늘은 확실히 본다잉?"

봄보미 모친의 표정이 '어이쿠어이쿠'거린다. 늙어가는 딸자식의 조크joke는 더 늙어가는 어머니의 가슴에 큰 위로가 되어 드리지는 못한다. (한숨이나 되어 드리지 않으면 다행.)


"나이 들면 누가 널 이렇게 병원에 데리고 다녀 줘?"

"누구긴 누구야, 나지."

호기롭게 말이라도 해 본다. 건강은 허세가 아니지만 엄마를 위로하는 '혼자 사는 딸'은 그거라도 해 드려야겠다. 엄마의 안심과 본인의 다짐을 위해서라도.

"왜? 내 발로 혼자서 걸어오면 되지. 지금도 내가 엄니, 아부지 병원은 잘 따라다니잖아? 그동안 이미 예습은 충분히 했지. 그리고 안 아프면 되는 거고!"

봄보미는 자신이 생각해도 논리가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냐?"

그렇지, 그건 또 그렇지. 마음대로 다 되면 그건 인생이 아니지. 그래서 인생이 지루할 틈이 없지, 맞지.


그러나 '아직 해 보지 못한 일'을 품은 채 늙어만 가는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 봄보미가 가진 것 가운데 '유럽 여행' 키워드가 없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생 여행'이 볼품없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여행: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


그래, 봄보미 인생, 그간 지루하긴 했다. 반전도 없었다. 여행도 딱히 없었다. 살던 곳에서 살고 자라던 곳에서 자랐다. 세상을 너무 좁게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봄보미는 종종 생각했다. 쭉 저점에서 시작하여 우물쭈물한 곡선을 그리다 결국 고점을 찍지 못한 채 그저 이렇게 끝날 일만 남은 인생인지도 모른다.


여행: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


그러나, 삶은 모두 여행. 지금 봄보미는 유람 중이다.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유람한다. 여기가 아프다고 소리를 내면 그곳으로 가 구석구석 살피고, 저기가 아프다 푸념하면 그곳으로 여행을 가 그 푸념을 쓰다듬는다. 봄보미는 되풀이되는 일상도, 그리고 되풀이 없이 툭 튀어나와 자신을 놀라게 하는 일상도 모두 다 여행이었음을 막연히 깨닫는다.


그러다 문득 봄보미는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을 둘러본다. 아버지가 벌써부터 두꺼운 오리털을 꺼내 입고 거실에서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티브이를 보고 계시고, 어머니는 엉덩이가 무거운 아버지더러 밥 차릴 준비나 하라고 사전 경고를 내보내신다. "얘는 왜 자기 방에 들어가서 안 나와?"라는 엄마의 다음 문장은 봄보미를 향한 것. 봄보마은 얼른 방에서 튀어나와 자신의 '사람들' 곁에 바짝 붙어 선다.


"조직 검사한 곳은 좀 어떻고? 안 아파?"

"아, 안 아파요."

우물우물 식탁 위에서 그들의 대화는 봄보미의 건강까지 넘어간다. 아직 통증이 남아 있고 멍 자국이 가시지 않았지만 봄보미는 지금 '여행 중'이므로 '여기, 함께' 있는 사람들 앞에서 아픈 내색을 감추고 환한 웃음을 내보인다.


그래, 여기가 봄보미의 여행지다.

봄보미를 걱정해 주고 그녀를 못내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조직 검사라는 유람 중에도 오매불망 자신의 귀환을 기다리는 그들이 있는 그곳.


봄보미는 오늘도 찬란히 '여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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