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님. 수정 작업 다 하시고 최종 인쇄하시기 전에 PDF 한번 보여주세요. (19.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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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님. 책 완성하셨나요? (19.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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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리는 (독립출판물을 만들기만 하고 제대로 완성하지 않은) 어느 게으른 제자를 챙기는 디자이너 쌤의 메아리다. 10살이나 더 많은 나 같은 늙은 제자를 살뜰히 챙겨 주던 우리 젊은 디자이너 쌤. 그 쌤을 만난 건 2019년 3월 중. 충무로에 있는 고래사진관에서였다. '전전전전전직장' 동료이자 친한 동생 황이 2019년 1월 내가 따끈따끈한 퇴사자일 때 물어다 준 '나만의 책 만들기 수업.' 어느 모임을 가든 조금 멋쩍고 민망한 나이지만 조심스럽게 고래사진과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 포함 수강생들 셋, 디자이너 쌤 하나. 다른 수강생 분들이 워낙 성격이 좋으셔서 나 같은 '아싸'도 스윽 스며들 수 있었다. 나는 그 수업에서 '돌고 돌아 퇴사일기'라는 독립출판물을 만들었다.(그런데 이 책은 1년 가까이 마무리 작업을 못 했다. 사은품으로 이 퇴사 책을 드리기로 한 출판사 서평단 분들이 총 여섯 분 계시는데 나는 아직도 이 사은품을 전해 드리지 못했다. 올해는 꼭 보내 드려야지.)
그때의 인연이 2020년 1월 말, 내가 우리 출판사에서 편집자로서 책을 내려던 시점에도 다행히 이어졌다. 디자이너 쌤과 나는 신사동 파리바게트 2층에서 조우했다. (누구를 만나든 20년쯤은 되어야 친해지는 성격 탓에 어색한 미소를 '흐흐'거리며 디자이너 쌤을 맞이했다.) 빵을 고르고 차를 함께 마신 후, 본격적으로 노트북을 켜고 표지와 내지 파일을 감수받기 시작했다.
인디자인을 이용해 내가 내지와 표지 파일을 만들긴 했지만 나의 인디자인 실력은 '어디서 주워들은 귀동냥' 수준이었다. 독립출판물을 한 번 만들어 본 정도의 실력, 독립서점 '별책부록'에서 인디자인 수업을 5주 동안 듣고도 금세 잊어버려서 "인디자인을 배웠었다고요?"라는 질문을 돌려받을 정도의 실력이다 그래서 더더욱 필히 이번 책 작업에는 디자인 감수가 필요했다.
미리 드린 pdf 파일을 디자이너 쌤이 이미 확인하신 후여서 작업이 순조로웠다. 내가 소제목 단어 끝에 거대한 별 모양을 달아 뒀었는데 그 부분도 지적해 주셨고 위치와 크기도 조정해 주셨다. 한결 깔끔하고 예뻤다.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서체 사이트도 알려 주셨다. (나는 당시 산돌구름만 쓰고 있었다.) 고딕체와 명조체의 차이점도 익혔고, 쪽수의 서체 크기가 어느 정도여야 실물에서도 보기 편한지도 설명해 주셨다. 내지 본문을 작업할 때는 자간과 장평이 어느 수준이어야 보기 좋은지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나는 인디자인에서 자유자재로 사진 모양을 자를 줄도 몰랐는데 디자이너 쌤이 현란한 손가락으로 표지 사진도 다듬어 주셨다. (현재는 디자이너 쌤이 다듬어 준 사진으로 표지를 정한 상태이다. 차후 달라질 수도 있지만 작가님의 1차 선택은 끝난 상태이다.)
장도비라도 처음에 내가 만들었을 땐 흑백 그림이었지만, 디자이너 쌤의 안목이 더해져 칼라가 들어간 예쁜 그림으로 바뀌었다. 본문을 2도(먹색+별색)로 정했었기에 굳이 검은색으로 장도비라를 정할 필요는 없었다. 거기다 부록의 색에 맞춰 도비라의 색을 농도만 달리 해서 바꾸니 훨씬 어여쁘고 '책 다웠다.' 그리고 디자이너 쌤이 개체를 지정해서 정렬하는 법도 알려 주셨는데 그건 홀랑 잊어버렸다. (집에만 가면 모든 기억이 순삭된다.)
내지를 감수받으며 새로이 알게 된 사실들이 많았다. 본문2도면 검정 말고 칼라 하나 들어가면 되는 거겠지, 까지만 생각했는데 단순히 그게 아니었다. 내가 지정한 칼라를 알아보고, 구체적으로 색상배열을 확인해야 한다. CMYK(4가지 색을 조합해 정의한 색) 중 K를 제외한 두 가지 색은 '0'의 숫자를 유지해야 했다.
디자인 감수를 받으러 나간 것이었는데, 완전히 인디자인 수업을 다시 듣는 기분이었다. 감수료를 많이는 못 드려도 빨리는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디자이너 쌤과 빠빠이를 마친 후 곧바로 대표님께 전화를 드렸다. 감수 결과물을 사진으로만 보여 드린 후, "대표님, 설 명절 전에 시원하게 쏘시죠."라는 말로 감수료 지급을 요청했다. 재빠른 입금에 디자이너 쌤도 기분 좋은 귀갓길이 되셨다.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았다. 작은 출판사의 장점은 역시 절차의 간소화인 듯하다. 의사결정이 빠르고 보고도 쉽다. 체계를 잡으면야 좋겠지만 체계를 세우다 정작 놓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앞으로도 작은 출판사의 장점을 살려서 우리만의 강점을 가진 출판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거기에 더해 욕심을 낸다면 언젠가는 디자인도 편집도 기본 이상은 하는 출판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디자인 감수를 의뢰하던 그날, 새삼 전문가의 소중함을 느끼며, '이제 디자인도 좀 공부해 놔야지, 그래서 나중에 디자이너 쌤께 외주를 맡기게 되면, 디자인에 대해서도 말이 통하는 그런 편집자가 되어야지'라는 다짐도 해 봤다. (근데 요새는 다짐만 하다 하루 다 간다.)
낯선 동네 신사동에서 디자이너 쌤이 먼저 자리를 뜬 후, 나는 오래도록 작가님의 책을 상상해 봤다. 본문 여백을 조정하기로 해서 할 일이 다시 산더미가 된 밤이긴 했지만, 그래도 '디자인 감수'라는 첫발을 내디딘 그날의 신사동 파리를, 나는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을 것 같다.
그날의 신사동 겨울 빵집은 달콤했고 또 제법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