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일지 07

넘지 말아야 할 선

by 봄책장봄먼지

-◯◯ 작가님, 어제 1차 수정 원고 보내 드렸는데요, 한번 확인해 보시고 다음 주 화요일까지 재수정해서 보내 주시길 부탁드릴게요!

-◯◯ 님, 문자 읽으니 메일을 빨리 확인하고 싶어졌어요. 감사합니다.



우리 출판사의 공저. 나도 이 공저에 참여했는데 내 원고를 제외한 스물일곱 개의 에피소드는 각기 다른 매력으로 편집자의 마음을 두드렸다. ‘같이 울고 웃는다’라는 뻔한 마음이, 이 공저의 초고를 읽으며 내 안에도 들어앉았다. 그런데 문제는 감동만 하고 거기서 머물렀어야 했는데 나는 그만 낄 때 안 낄 때 가리지 않고 편집권을 휘두르고 있었던 것.



-안녕하세요. ◯◯ 편집자님.

잠들기 전에 1차 수정 원고를 읽어 보았는데요.

편집자님의 의도가 느껴지는데 제 머리가 뒤죽박죽되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제 스타일의 글이 아니라서 그런가 봐요.

남의 글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

자기 전에 읽어서 머리가 띵해서 그럴 수도 있고요.

정성껏 수정해 주신 흔적이 보여서 감사합니다.

최대한 빨리 답변드릴게요.



부랴부랴 작가님의 초고를 다시 읽으며 오탈자나 문법 위주로 손을 보고, 어색한 문장구조만 몇 부분 다듬었다. 정말 좋은 문장이어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참다 참다 앞으로 빼 두긴 했다. 덜 건드리려 노력해도 자꾸 좋은 문장이 눈에 띄어서 이를 전면에 배치하고만 싶어진다.


-작가님. 제가 작가님 글을 더 빛나게 할 생각에 손을 많이 댔나 봐요. 좋은 초고로 이리저리 즐겁게 고민하다 보니 처음 작가님의 의도에서 벗어났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편히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해요.



바로 작가님께 톡을 보내 드렸다. 발끝까지 화끈거리는 느낌이었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한 사람의 원고를 쭉 작업할 때는 그 사람이 되어, 그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그 사람의 손으로 문장 끝을 다듬는다. 그런데 공저가 되다 보니 스물일곱 분과 작업을 한다. 게다가 공저는 딱 한 개의 꼭지로 작가님의 성향을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단 한 꼭지로 개별 작가님의 글 쓰는 스타일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어쩌면 작가님 글에 내 스타일을 얹히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건방졌다. 오만이거나 자만이었을 수도 있다. 겸손한 척은 혼자 다 하고 살았으면 정작 글에서만큼은 ‘이렇게 쓰면 더 좋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못 버렸나 보다. 얄팍한 상식이나 어쭙잖은 안목으로 ‘프로건방러’가 되어 버렸다.


“글 쓰는 일 좋아하는 편집자들은 그 스타일을 버리는 데 상당 부분 힘들어하더라고.”


지난여름, 한겨레출판편집학교를 다닐 때 선생님께서 내 편집 글을 보고 해 주신 말씀이다. 그 말씀을 그새 잊고 나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선은 지키라고 있는 것일 터인데...

작년 문학동네 프리미엄 강연에서 문유석 판사님이 하신 말씀도 문득 생각난다. 그분은 자기 책에 ‘나는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쓰셨다고 한다. 그런데 출판사 편집장님이 ‘그다지’를 빼고 ‘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시작하자고 하셨단다. 본인은 ‘내가 사람을 안 좋아하지는 않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논의 끝에 ‘그다지’를 뺐다고 했다.


나는 딱 거기까지만, 그 정도로만 했어야 했다. 선을 밟거나 넘는 일 없이. 정말 글이 글다워지는 딱 그 정도의 선만 짚었어야 한다. ‘그다지’를 빼는 정도로만. 그리고 하나하나 작가님과 논의를 했어야 한다. 공저 작업이라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내가 수정해서 1차 수정 원고를 우선 보낸 후, 작가님이 보시고 마음에 안 드시거나 사실 관계에 오류가 있으면 다시 작가님께서 고쳐 주십사, 이런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어쩌면 나, 공저의 교정 작업을 가볍게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앞선 작가님들이 본인들 글이 깔끔히 다듬어져서 참 좋다고 말씀해 주셔서 주제에 우쭐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님을 지우고 그 자리에 내 글자가 살아온 방식대로 새 옷을 입히려 했던 건 아닌지, 편집자는 재건축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쩌면 인테리어에 살짝 참여하는 사람이고, 참여를 하더라도 청소하고 정리정돈을 하는 일을 더 기본 임무로 잡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넘지 말아야 할 선에 자꾸 다가가다가 위태위태한 그 줄다리기 앞에서 겨우 숨을 돌려 돌아 나온다. 편집자에게는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는 ‘눈치 챙겨’의 마인드가 필요한 듯하다. 나아가 누가 봐도 이 책의 편집자가 나인 줄 모르도록 최선을 다해 나를 숨겨야 한다. '나'라는 편집자는 뒤에 서는 연습을 해야 한다. 앞에 세울 사람이 누구인지, 앞에 두어야 할 글이 누구의 글인지 더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글이,


“가장 나답지 않으면서 가장 당신다운 글쓰기가 되도록.”


나는 조금 더 편집자가 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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