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의 화면을 마주하는 것은 마치 투명수채화 혹은 동양화의 착각을 느끼게 한다. 그의 붓은 넓고, 물의 농도는 얇다. 그리고 물의 농도 얇게 물감을 펴 바른 캔버스 위로 지나갈 때, 붓면의 가장자리에는 선들이 생겨난다. 이 선들은 애니메이션처럼 그려진 명확한 윤곽선과는 다르다. 면의 윤곽까지 그러데이션을 품고 있어, 면과 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고, 때로는 그 구분을 완전히 지워버린다.
《Blue and Silver: Chelsea》(1871)를 보면, 템스 강변의 푸른 저녁 안갯속에서 형태들은 거의 녹아내린다.
마른 물감 위에 다음 터치를 올리면, 유화임에도 불구하고 점차 수채화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이것은 휘슬러만의 독특한 기법이다. 휘슬러에게 사람은 중심이 아니다. 적어도 전통적인 초상화가 요구하는 방식으로는. 그의 화면에서 인물은 풍경의 일부이며, 분위기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다. 특히 인물의 형태 위로 물길이 지나가는 듯한 표현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어쩌면 하나의 사상이다. 우리가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것들 말이다. 휘슬러는 인간을 특권적인 주체로 보지 않는다. 대신 인간을 빛과 색, 공기와 침묵 속으로 위치시킨다. 우리는 풍경을 보는 자가 아니라, 풍경의 일부가 된다.
《검은색과 금색의 야상곡》(1875)에 이르면, 어둠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금빛 불꽃들을 품은 하나의 살아있는 공간이다. 밤하늘에 흩뿌려진 불꽃은 마치 별처럼, 혹은 물 위의 금가루처럼 검은 화면 위에 떠오른다.
휘슬러는 관객의 시선을 유도하는 탁월한 감각이 있다. 바닥에 장식을 배치하여 때로는 시선을 화면 하단에 두기도 하고, 정돈된 구도로 손이나 사물을 중앙에 배치하여 시선을 한데 모으기도 한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크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러한 화면 구성은 관람자에게 고요함과 정돈됨을 선사한다. 마치 명상하듯, 그저 화면의 톤과 리듬 속으로 빠져든다.
《흰색 교향곡 1번, 하얀 소녀》(1863)에서 소녀의 드레스는 단순한 의상이 아니라, 하나의 흐르는 빛의 덩어리가 된다. 《회색과 흰색의 배치 1번》(1871)에서 어머니의 옆모습은 정확한 인물 묘사보다는, 회색 톤 속에 놓인 하나의 형태, 하나의 존재감으로 다가온다.
《회색과 녹색의 교향곡》(1866-1872)에서 색채와 톤의 조화가 대상의 재현보다 우선한다.
"순간을 사랑하는 자만이 영원을 소유한다"
— 괴테
괴테의 말처럼, 순간을 사랑하는 자만이 영원을 소유한다. 휘슬러의 그림들은 순간의 분위기를 포착하지만, 프레임 안에서 고요한 분위기는 우리가 서있는 공간까지 번진다. 템스 강의 어느 저녁, 어머니가 앉아 있던 어느 오후,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서 있던 어느 순간을 휘슬러는 침묵하는 공간으로 채운다.
그의 작품은 보는 것이 아니라 머무는 것이다. 분위기의 흐름처럼, 시선의 움직임처럼, 우리는 그 화면 속에서 잠시 멈춘다. 그리고 그 멈춤 속에서, 우리는 찰나에 아주 참된 고요함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