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비혼모임을 시작하여 자기 자신으로 잘살아오는 동안, 이 사회에서 안전한 둘레가 되고 버팀목이 되어준 비혼여성공동체 '비비'가 있었다. 나는 비비의 한 개인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는 쌓아온 신뢰를 안고 어떻게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고 있는지, 개인과 공동체가 어떻게 조화롭게 지속할 수 있는지, 지난 20여 년간의 비혼생활과 공동체적 삶을 돌아보고자 한다. 비혼, 공부, 여행, 독립, 공간, 소설, 돌봄, 공동체, 글쓰기 등 주제를 잡아 한 주제당 3~4편 글을 쓸 계획이다.]
[비혼 3] #. 결혼하면 탈퇴하나요?
마스크 소형 쓸 사람 있을까요?
‘미르’한테 물어봐. 애들이 어리지 않나? 잘 있냐고 안부도 좀 물어보고.
공간비비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다. 소설읽기 모임이나 요가를 하러 오는 여성들은 아이가 훌쩍 큰 기혼이거나, 아이가 없는 기혼이거나, 결혼하지 않은 비혼이거나, 어찌 되었든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낼 정도 여력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마스크 소형을 쓸, 어린아이가 있는 사람.
미르에게 오래간만에 안부를 묻고, 마스크를 퇴근길 우편함에 넣어주기로 했다. 소설읽기 모임 안 나오나, 말을 삼켰다. 그녀는 소설읽기 모임 초창기 참여자였다. 너 잘 있냐고 마을 언니가 물어보래. 그냥 잘 있어요. 그냥 잘 있다는 말은 잘 안 있다는 말인데, 마을이 뉘앙스를 알아챈다. 미르는 비비 구성원 대부분이 사는 아파트에서 도보로 20분 내 거리에 있는 다른 아파트에 산다. 나는 집에 들러 마스크와 시골에서 공수해 온 봄동 김치를 챙겼다. 산책 삼아 걸어갔다가 우편함에 넣고 인증사진과 함께, 오늘 안으로 가져가라는 문자를 보내고 돌아왔다. 한참 후에 잘 받았다는, 김치가 맛있다는 답장을 받았다. 그래, 미르는 잘 있는 거로 하자. 혼자서 자문자답했다.
미르는 멀지 않은 곳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공간비비에 자주 올까 싶었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는 쉽지 않았다. 명절 때마다 친정에 인사 오듯 사과 한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첫해는 남편과 함께, 다음 해는 아이 손을 잡고 들렀다. 그녀 가족이 돌아간 후 우리는 그래, 결혼하길 잘했어, 안도인지 안심일지 모르는 마음들을 들킨다. 미르는 잘 있는 거다.
미르는 비비 2기 구성원이었다. 나는 그녀가 결혼하기 전 살던 집 뒷 동으로 이사 왔다. 내 집 베란다에서 그녀의 집 작은방 창이 나 있는 복도가 보인다. 그녀와 내 집은 일자 복도형이다. 그녀가 며칠씩 연락이 안 될 때 나는 저녁마다 앞 동 비슷한 층에 사는 그녀의 작은방 불이 켜져 있는지를 확인했다. 불은 쉽게 켜지지 않았다.
비비 2기가 1년 만에 해체한 후 미르는 비비와 함께했다. 비비가 가장 활발하게 여행을 다닐 때였다. 2006년 버스가 올라가지 못해서 별빛을 벗 삼아 오르고 올라서 맞이한 노고단 해맞이, 2007년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백두산 천지, 2008년 내 인생에 더는 갈 수 없을 것 같은 겨울 한라산 등반 등 기억에 남을만한 굵직한 여행에 그녀가 있었다. 그즈음 찍은 사진을 보면 단체 사진은 여섯 명이었다가 일곱 명이었다가 했다. 그녀는 모임에 나왔다가 안 나왔다가 했다. 그녀의 불안이 스멀스멀 전해왔다. 그 불안을 감지할 뿐 불안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채로 나는 날마다 까만 밤 베란다 앞에 섰다. 그녀의 방 불빛이 켜지길 기다리며 그녀의 마음속 불빛도 켜지길 바랐다.
비비 구성원들은 모임에 집중했다. 비비의 공부 내용이 ‘공동체’로 옮겨갈 즈음이었다. 결혼하지 않은 정상성에서 벗어난 삶에 대해 쏟아지는 불편한 시선보다는 각자 개인이 원하는 삶을 고민하고, 그것을 비비 안에서 풀어냈다. 나 홀로 설 힘을 얻고, 그것을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과 나눌 수 있다면 충분했다. 뒤늦게 비비에 들어온 그녀가 비비라는 공동체 안에서 괜찮은 건지 궁금했다. 우리로 괜찮은 건지, 비비라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자기 삶이 괜찮은 건지 묻고 싶었다. 2012년 미르는 결혼을 선택했다.
결혼하면 탈퇴하나요?
지인들은 모임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궁금했고, 비비가 궁금한 결혼하지 않은 당사자들은 이렇게 물어왔다. 거기 들어가면 결혼 못 하나요? 미리 정해놓은 것은 없다. 지켜야 할 규칙이라면 월 1회 정기모임 참여와 월 회비 납부 정도이다. 어떤 사안이 생겼을 때는 긴 회의를 하거나,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할 때는 몇 차례 워크숍을 진행했다. 그때는 아직 결혼한 사람이 없었고, 누군가 결혼을 선택하게 된다면 그건 그때 가서 결정할 일이었다.
거기 들어가면 결혼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 들어가도 비혼의 삶이 나와 맞지 않는다면, 내가 원하는 바가 거기 없다면, 그것으로 안정감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오로지 나를 이해하고 받아줄 한 사람이 필요하다면 결혼을 선택하지 않을까. 결혼이 주는 제도로서의 안정감과 파트너로서의 친밀감은 분명한 거니까. 누구나 비혼을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누구나 결혼을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비혼의 삶에서도 누구에게나 공동체가 괜찮은 것은 아니니까. 미르는 결혼 후 탈퇴라 할 것 없이 현실적으로 모임에 나오기 어려웠고, 멀리 가지 않고 공간비비 회원으로, 옆 동네 이웃으로 있다. 서로가 괜찮은 정도의 거리에서 만든 연결점이었다.
도서관 가는 길, 저 멀리 학교 앞 미르와 아이가 보인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
그냥저냥 지내요.
이제는 물어볼까?
미르, 너는 이제 안정감에 이르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