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비혼모임을 시작하여 자기 자신으로 잘살아오는 동안, 이 사회에서 안전한 둘레가 되고 버팀목이 되어준 비혼여성공동체 '비비'가 있었다. 나는 비비의 한 개인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는 쌓아온 신뢰를 안고 어떻게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고 있는지, 개인과 공동체가 어떻게 조화롭게 지속할 수 있는지, 지난 20여 년간의 비혼생활과 공동체적 삶을 돌아보고자 한다. 비혼, 공부, 여행, 독립, 공간, 소설, 돌봄, 공동체, 글쓰기 등 주제를 잡아 한 주제당 3~4편 글을 쓸 계획이다.]
[비혼 4] #. 내 이럴 줄 알았나!
나는 어떻게 비혼의 삶을 살게 되었나? 내내 돌아본다. 돌아봐도 그 자리다.
비비 이야기를 들으러 다른 지역에서 비혼여성들이 찾아온다. 비혼의 삶을 살아가는 앞선 세대로서 비혼여성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묻는다. 나는 그런 말은 없다. 그냥 뭐 각자 알아서 살아가는 거지, 우리도 그러지 않았나. 4B(비혼, 비출산, 비연애, 비섹스), 6B(4B+비소비, 비돕비) 등 정치적 입장을 갖고 비혼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어쩌다 보니 비혼, 알고 보니 비혼’인 내가 무엇을 말하리. 저는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할 때 즐겁고 기쁘고 재미나는지 잘 알아보면 좋을 것 같아요, 비혼의 삶에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우리도 비혼은 처음이라서요. 속말과 다르게 너무 뻔한 겉말을 내뱉는다. 그건 비혼여성이 아니라 삶을 획득한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 같은 거 아닌가. 자기 자신을 알기.
고등학교를 전주로 나오지 않고, 마침 면 소재지에 세워진 고등학교를 2회로 졸업했다. 상위권 학생들을 도시로 내보내지 않으려는 유지들의 야심 덕분이었다. 부모님도 나도 거절하지 못하는 마음이 더 컸다. 동네 분위기가 한몫했다. 뭔가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입시원서를 쓸 즈음 날마다 집으로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알다가도 모를 사명감이 작동했다. 오빠들은 이미 전주로 나갔고, 여동생은 나중에 전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하필 그때 거기에 고등학교가 세워질 것은 무엇이람 정도의 한탄을 내뱉었다. 나는 1987년 3월, 10만 원 장학금을 받고 집에서 도보 10분 거리 위치한 신설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결국, 1999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통합하고, 2022년 2월 34회 5명 졸업(총 1,568명) 학교 연혁을 확인했다. 내 이럴 줄 알았나. 나는 1,568명 중 한 명이다. 언제 모교가 사라질지 알 수 없다.
전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더라면 더 좋은 대학에 갔을까? 내 인생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글쎄다. 가보지 않은 길이다. 나는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잔디 씨를 훑으러 학교 근처 산속으로 들어가서 길을 잃었던 일, 야간 자율학습을 땡땡이치고 시장 다리 밑에서 친구들과 놀던 일, 대학 시험을 앞두고 학교 앞에서 친구랑 자취를 시작한 일이 기억난다. 하필 수학 성적이 때맞춰 잘 나와서 이과를 선택하고, 교사에 대한 경애의 마음으로 사범대학에 들어갔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범대학 물리교육학과를 가까스로 1년 다녔다. ‘사범’보다 ‘물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직업보다 전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전공을 F학점 받고서야 삶의 방향을 변경했다. 그해 겨울 전문대학 산업디자인학과 시험을 봤다. 이듬해 자퇴서를 제출하고 다시 입학확인서를 받았다.
나는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줄곧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나, 무엇을 할 때 즐겁고 기쁘고 재미있나. 나는 무엇을 할 때 살아있다고 느끼나. 나는 무엇을 잘 할 수 있을까, 나의 적성에는 무슨 일이 잘 맞을까, 나는 어떤 삶을 원하나. 나는 이과를 선택했지만, 그것은 나조차도 나를 잘 몰랐던 나날의 선택이었다. 그 후로 나는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면서, 좋아하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학창 시절에는 부모님에게 받은 쪼들리는 용돈 중에서 소설 한 권을 꼭 샀다. 직장을 다니고부터는 월급에서 소설 열 권을 샀다. 퇴근하고 소설을 읽었다. 소설을 읽고 리뷰를 써서 사내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것은 신문 편집 본래 업무가 있는 나에게 별책부록이었다. 가르치는 것보다 배우는 것을 더 좋아했다. 가르치는 것을 잘하지 못한다는 것을 강사 활동하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문화에 목마르고, 시간과 돈, 몸과 마음을 거기에 썼다. 교사는 꿈이었을 뿐, 나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나에게 비혼은 정치적으로 가치나 신념에 따른 결심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선택한 삶에 가깝다. 비혼의 정체성은 비혼으로 살아가는 순간마다 조금씩 분명해지면서 만들어갔다. 경제활동을 시작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직장이었고, 연애는 좀 피곤한 일이었다. 연애보다 재미있는 일은 많았다. 여러 모임에 참여하고 거기에 소속감을 느끼면서, 집으로 돌아와 홀로 있을 때 평온했다. 친구들과 신나게 여행을 다니면서, 가장 좋을 때는 집으로 돌아와 가만히 있는 집 풍경을 만날 때였다. 시골집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북적북적 시끄러운 한때를 보내는 것도 좋은데, 더 좋은 것은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와 그간의 시끄러움을 상쇄할 적요를 만날 때다. 타인들과 같이 있을 때도 좋고, 홀로 있을 때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을 고르라면 분명 나는 혼자 있을 때다. 그때 내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때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만 소설이다.
이과가 아니라 문과를 선택했더라면 나는 더 빨리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았을까? 어긋난 이과 선택이 없었더라면 나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몰두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 흐름에 편승하여 의심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고, 나를 붙들지 않고, 그냥 따라가게 두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고민하지 않고 결혼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문과와 이과 중에서는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결혼은 반드시 선택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 선택의 범위가 있다면 결혼하거나, 결혼하지 않거나. 결국, 나는 계속 결혼하지 않거나를 선택한 셈이 되었다. 내 이럴 줄 알았나. 나는 비혼의 삶으로 50을 갓 넘은 1인 가구 비혼 중년여성에 도착했다. 덤으로 얻은 이 문과로의 회귀적 삶이 좋다.
나에게는 (피로 물든) 가족이 있고, (함께 나아갈) 비비가 있고, (돌아와 혼자 있을) 집이 있다. 그리고 (좋아하는) 소설이 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비혼의 삶이 나의 적성에 아주 잘 맞는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비혼여성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이건 진심이야.
당신이 선택한, 당신의 비혼의 삶이, 당신에게도 잘 맞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