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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혼들의비행 Jan 15. 2023

[공부 1]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비혼들의비행_비혼여성공동체 비비로 살아가기

[2003년 비혼모임을 시작하여 자기 자신으로 잘살아오는 동안, 이 사회에서 안전한 둘레가 되고 버팀목이 되어준 비혼여성공동체 '비비'가 있었다. 나는 비비의 한 개인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는 쌓아온 신뢰를 안고 어떻게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고 있는지, 개인과 공동체가 어떻게 조화롭게 지속할 수 있는지, 지난 20여 년간의 비혼생활과 공동체적 삶을 돌아보고자 한다. 비혼, 공부, 여행, 독립, 공간, 소설, 돌봄, 공동체, 글쓰기 등 주제를 잡아 한 주제당 3~4편 글을 쓸 계획이다.]



공부 더 헐라믄 혀. 너그 아부지가 돈 대준대.

엄마, 돈 많아?

아니, 너만…….    

 

무슨 공부를 더 해? 돈이 없어서 대학원에 안 가나? 나, 공부는 날마다 해, 라고 엄마한테 말하지는 않았다. 부모는 원대로 4형제를 대학에 보냈다. 셋은 더 공부하여 석사, 박사가 되었다. 가방끈 길이로 보자면, 전문대를 졸업한 나는 엄마의 아픈 손가락에 속했다.    

 

비혼모임을 시작하고, 매달 한 권씩 학습 도서를 정했다.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이 좋았다. 훗날, 기억할 것이다. 모임이 한 단계씩 진화할 때마다 ‘공부’가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을. 내가 지닌 결핍이 궁극에 나를 자유롭게,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우리가 함께 읽은 책이 서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공부 1] #.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일곱 살,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친구들은 돼지띠, 나도 덩달아 돼지띠였다. 돼지띠가 아니라 쥐띠라는 것을 몇 살 때 알았는지 모르겠다. 학번이 생기기 전까지 난 돼지띠였다. 대학을 연이어 두 번 들어갔다. 학번이 두 개 생겼지만, 자퇴한 학번은 사라지고 졸업한 학번만 남았다. 그때 동급생들은 쥐띠였다. 직장을 다니면서 주민등록번호를 적었다. 난 쥐띠로 알고 있고, 일곱 살에 들어가 돼지띠랑 동년배로 살고 있는데, 주민증 생년은 쥐띠도 아니고, 당연히 돼지띠도 아니고, 어라 소띠였다. 맞다. 그땐 다 그랬다며 태어나 1년 뒤에 출생신고를 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난 호적상으로 여섯 살에 학교에 들어간 것일까? 그것이 가능할까?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른 인생 시차다.      


복잡한 출생의 역사. ‘빠른’ 년생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나는 늘 3년 나이를 아우르며 산다. 돼지띠와 친구이고, 쥐띠 정체성으로, 소띠 법적 절차를 행한다. 너는 누구인가? 너는 몇 살인가? 나는 쥐띠 나이를 말하지만 그건 내가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오로지 ‘나’만 인식하는 것이지, 사회 어디에서도 ‘나’를 증명할 수 없었다. 나에 대한 설명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했다. 내가 설명한 ‘나’가 나가 아닐지라도, 그들이 해석한 ‘나’가 나가 아닐지라도 나는 그런 채로 견뎠다. 


너는 왜 결혼하지 않았는가? 너는 비혼주의자인가? 아니, 그게 아니라……. 질문받을 때마다 나는 너에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난감했다. 나는 말주변도 없는데 말이다. 나는 인터뷰이가 되는 것이 싫었다. 나는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나는 나의 서사에서 부정문이 아니라 긍정문을 얻고 싶었다.      


엄마, 나를 왜 일찍 보냈어?

몰라, 네가 하도 울어서였나.     


나는 4월생이라 사실 ‘빠른’도 아니다. 키도 작다. 나는 어려서부터 무턱대고 코피를 쏟았다. 아버지는 나를 들쳐업고 뛰었다. 간판 없는 곳, 환자들은 뿌연 안개 속, 방마다 쪼그리고 앉아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제일 안쪽 엄마 곁에서 비몽사몽으로 눈을 떴다 감았다 한다. 내가 경험한 첫 병원은 제도 밖, ‘야매’의 지역이었다. 나는 툭 치면 멍이 들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회초리를 들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말이 없는 아버지는 말을 하러 학교에 왔다. 이 아이는 때리면 안 됩니다. 대기만 해도 시퍼렇게 멍이 듭니다. 나는 아버지의 바람처럼 되지는 않았다. 열심히 맞았다. 학교는 그런 곳이었다. 거기까지였다. 그동안의 안전한 보호, 온전한 자기 존중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회에서 겪는 온갖 훼손의 감정은 나를 힘들게 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나를 보호했다.   

  

말할 수 없었다. 나는 합격을 했다고. 1990년, 작은오빠의 불합격 소식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엄마는 울고 있었고, 아버지는 소죽을 끓이고 있었다. 나는 기쁨을 발설할 수 없었다. 대학에 아들이 떨어지고, 딸이 붙었네. 마실 온 동네 아저씨는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날 억지로 밀어 넣은 저녁 식사의 체기가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그해 작은오빠가 후기에 합격하고, 나는 물리교육학과에 입학했다. 큰오빠가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여동생은 아직 중학생이었다. 부모님은 가진 것이 많지 않았다. 몇 마지기의 적은 논, 밤을 낮 삼아 일할 수 있는 철인의 몸, 자식을 가르치려는 거대한 마음. 하지만 한 해에 대학생이 세 명이라니. 외양간의 소는 해마다 한 마리씩 사라졌다.     


주말에는 용돈 전쟁이 일어났다. 시골에 현금이 어디 있나. 먼저 용돈을 받아오는 사람이 임자다. 엄마는 옆집에서 돈을 빌려오는 날도 있었다. 그 돈은 달러 빚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3만 원을 들고 전주로 돌아와 서점에 간다. 홍지서림에 쪼그리고 앉아서 세명문화사 한마당문고, 학원사 한권의책, 범우사르비아문고를 훑으며 천 원짜리 문고판을 몇 권 살 것인가 고민한다. 사야 할 것은 많았다. 순위로 따지자면 소설책은 살 수 없는 물건이었다. 용돈이 모자라면 모자랐지 남은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나는 필요와 욕구를 그때부터 저울질했다. 그 저울질이 삶의 긴장감을 가져왔다. 나는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더 공부하지 않고, 직장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월급을 받아 책을 몽땅 사는 것이 가장 기뻤다. 전세금을 모아 2년마다 조금 더 나은 집으로 이사했다. 책이 가득한 서재가 있는 집을 상상했다.     


2010년 나는 비비 구성원이 모여 사는 아파트로 이사했다. 이사 오기 전 도면을 그렸다. 가장 먼저 책장을 놓을 벽을 확보했다. 거실은 그런대로 서재 느낌이 났다. 그해, 비비는 ‘공간비비’를 열었다. ‘마을’과 ‘주얼’, 그리고 내가 다니던 직장을 정리하고 공간비비에서의 상근을 결정했다. 우리는 집에서 공간으로 필요한 것들을 옮겼다. 나는 책을 공유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나에게 책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긴 정규직에서 벗어난 삶은 소비의 범위를 좁혀왔다.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은 책이었다.    

 

책장을 정리하다가 한순간 번뜩인다. 더 이상 책을 꽂을 곳이 없다. 하나둘씩 책을 쌓아놓기 시작한다. 더 이상 책장을 놓을 벽이 없다. 책을 그만 사거나, 책을 정리해서 버려야 하는데, 아니, 책을 버리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겨우 오래된 각종 잡지와 모아놓은 팜플렛을 조금 버렸다. 사도 사도 더 사고 싶은 마음,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영역, 결핍 때문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결핍이 욕망으로 치달을 때, 나에게 책은 가방끈이나 다름없었다. 책을 읽고 싶은 것보다 책을 갖고 싶다. 책을 빌려 읽지 않는다. 책을 빌려주지 않는다. 책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래, 책이 아름답구나.     


아침마다 인터넷 서점 사이트를 들어간다. 오늘은 무슨 신간이 나왔나. 오늘은 무슨 중고 책이 올라왔나. 밤새 나의 장바구니에 넣어놓은 중고 책이 판매되었구나. 장바구니를 비우고, 2만 원 선에서 쇼핑한다. 기준점을 정한 것은, 이 마음은 해소되지 않을 테니까. 이 마음은 사그라지지 않을 테니까. 다만 순위를 정한다. 1순위는 비비 학습 도서다. 주디스 버틀러의 『윤리적 폭력 비판』(인간사랑, 2013)을 넣고, 내년에 읽을 ‘소설읽기’ 중고 도서를 찾는다. 이럴 거면 차라리 학위를 따는 것이 나으려나. 돈이 들어가는 것은 매한가지구나.    

  

나는 무엇보다 『윤리적 폭력 비판』의 부제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가 마음에 든다. 나는 한결 마음이 가뿐해졌다. 그렇게도 싫었던 자기소개 시간이 이제 두렵지 않다. 나에게 설명을 부탁하는 ‘너’와 마주 본 상태에 맞닥뜨리더라도, 나는 이제 침묵으로 저항하지 않는다. ‘설명불가능의 슬픔’이 나를 압도해도 간신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기꺼이 훼손당하려는 자발성은 고통스럽지만, 나는 책임을 떠올려 이 글을 쓴다.  

   

‘너의 질문 덕분이야!’

‘나의 응답이 들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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