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사주세요

해안이의 첫 피아노

by 봄남


해안이가 막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할 때 이야기다. 해안이는 피아노가 집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여러 차례 해왔다. 피아노가 있으면 더 열심히 연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누군들 안 사주고 싶을까. 피아노를 갖고 싶은 열정은 피아노 배우는 진도가 빨라질수록 더 커졌다.


어느 날 남편과 대형 마트에 갔다가 마트 초입 부에 전자 피아노가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소리 조절도 가능하고 헤드폰을 끼고 저녁에도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얼마나 연주를 하겠냐마는 피아노에 열정적인 지금의 해안이라면 충분히 저녁 연주도 가능할 일이다.


마침 특별 세일 기간이라 평소 가격보다 더 싸다. 하얀색 셔츠에 검은색 슈트를 입은 듯 날씬한 자태를 하고 있는 저 피아노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마치 운명의 만남처럼 느껴졌다. 괜히 한 번 가서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보고 소리에 귀 기울였다. 터치감과 소리의 연결이 완벽했다.


“해안이가 정말 좋아하겠는데!” 나는 반짝 거리는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달라는 뜻이었다.


손가락으로 미끄러지듯 건반을 쓸어내렸다. 나의 피아노 소리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들자 ‘나의 피아노’를 가로챌 것만 같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구매력이 상승한 나는 남편에게 앞으로 10년은 더 쓰고도 남을 것이고 이 정도는 딸에게 투자해도 괜찮다고 폭풍 랩을 하듯 설득했다.


남편은 늘 나의 찰떡같은 ‘사야 되는 이유’에 용케 말려들지 않는다. 그런데 남편이 핸드폰으로 다른 가격대를 비교해 보더니 ‘이건 나올 수 없는 가격’이라며 지금 사도 좋다고 했다. 해안이 피아노인데 내가 선물이라도 받는 것처럼 흥분이 되었다. 피아노는 일주일 뒤에 배달된다고 했다.


정확히 일주일 뒤, 아무도 방문하지 않을 시각에 벨소리가 나서 인터폰 모니터를 확인해 보니 어떤 아저씨가 기다란 피아노 박스를 들고 서 있었다.


“해안아 드디어 피아노가 왔어!”


흥분된 목소리로 해안이에게 기쁜 소식을 알렸다. 피아노 아저씨는 피아노를 조립해주고 여러 가지 버튼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수염이 나고 키가 큰 아저씨는 소도 때려잡을 것 같은 덩치에 비해 마음이 섬세할 것 같은 목소리를 가졌다. 모든 설명을 마치고 아저씨는 해안이에게 피아노 열심히 배우라며 격려의 말을 해주고 떠났다.


해안이는 피아노를 보더니 너무 좋은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마치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마저 끝내겠다는 결심을 한 듯, 피아노를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그리고 그 피아노쯤은 내게 별일도 아니라는 듯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그 모습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세련됨과 겸손 그리고 과시가 동시에 있었다. 얄밉지 않은 그런 모습이다.


“해안아! 피아노 쳐봐!” 나는 어깨춤을 추며 난리 법석을 떨었다.

“잠깐 이거 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책상에 앉아서 차분한 목소리로 나를 저지시켰다.


피아노를 사려고 했던 나의 치열함이 무색해질 정도로 그녀는 평온했다. 아빠를 설득했던 과정과 큰 결심의 대가가 이런 거였을까. '뭐야 왜 사준 거야? 나 잘한 거 맞지?' '쟤 너무 좋은데 티 안 내려고 그러는 거 맞지?' 여러 가지 생각이 뒤엉킨 채 얼마간 해안이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해안이는 잡고 있던 크레파스를 혼신의 힘을 다해 색칠한 다음 경건한 마음으로 손을 씻고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태오도 덩달아 신이 나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녀가 한 손가락 한 손가락 건반을 칠 때마다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해안이는 그제야 함박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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