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희 씨는 남자 친구가 있다고 했다. 그런 사실이 당장 진혁에겐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를 하루 종일 감상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감사했다. 그녀의 목소리, 배우려는 의지의 눈빛, 사뿐히 걸어가는 걸음 하나하나 설레었다.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노골적이어서 주변에 연애에 예민한 몇몇은 이미 눈치챈 모양이다.
“진혁 씨 요즘 좋은 일 있나 봐?”
지나가던 소정 상사가 실눈을 뜨며 말했다. 중년에 접어 들은 그녀는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외모에 미혼이고 항상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아.. 아뇨..”
반사적으로 마음을 숨기고 싶었지만 순진한 그는 그 짧은 말에 모든 것을 드러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뭐 여하튼 잘해봐.”
그녀는 그를 응시하며 두 손가락으로 자기 눈과 진혁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가리키면서 멀어졌다. 그것이 응원의 말인지 잠시 헷갈렸다. 그녀의 말투에서 얼핏 화를 느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파악했으니 숨기지 말라는 협박처럼 들린 건 그의 착각일 것이라고 스스로 일러두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황급히 다희 씨를 찾았다. 아무 곳에도 없다. 손목시계를 보니 시곗바늘이 1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나갔나 보다. 타이밍을 놓쳤다. 같이 점심 먹자고 제안하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상사와 이야기하는 사이에 빠져나간 것 같았다.
내일은 점심을 같이 먹으리라 다짐하지만 체감 시간이 백만 년이나 먼 거리에 있는 것 같았다.
회사밥이 지겨워 맥도널드에 들어가 빅맥을 시켰다. 트레이를 받고 이층에 있는 구석 자리로 올라갔다. 이 층 창가에 앉아서 밑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날따라 봄기운에 온도가 상승한 탓인지 모두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하늘은 파랗고 나무마다 새잎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옅은 한 숨을 쉬었다.
혼자 만의 사랑이 시작된 건 불과 한 달 전이었다.
진혁은 사무실 책상 주위로 사방에 놓인 칸막이가 불현듯 답답해져 무작정 거리로 뛰 쳐 나가기로 했다. 사방에 공기가 없어지는 것 같았다.
“진혁 씨 어디 가요?”
“저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바깥공기는 생각보다 차가웠고 그 차가움이 목까지 느껴지자 숨 쉬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신생 회사지만 미래 지향적이고 아무도 모르는 분야에 먼저 뛰어는 다는 흥분 때문에 선택한 회사였다. 만 3년 차가 되었지만 여유 있을 줄 알았던 생활은 그전보다 나아진 것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절망감만 더 커졌다. 다행히 일이 적성에 맞고 고소득 연봉이라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돈을 아무리 모아도 집을 마련할 수 없었고 지금 가지고 있는 빚을 갚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그는 ‘산다’기 보다 ‘살아내기’ 바빴다. 무작정 걷다가 어느 덫 다다른 한 커피숍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살짝 고민하는 척하다가 여느 때처럼 카페 라테를 시킨 후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음악 소리에 파묻혀 사람들의 대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유난히 크게 들리는 한 숨소리에 고개를 돌아보았다. 구석진 자리에서 어떤 여성이 노트북을 앞에 놓고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문득 회색이 섞인 파란 셔츠에 짙은 검정 머리가 나무로 된 벽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뜬금없는 생각에 그는 날 파리를 쫓아내듯 고개를 휘저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급하게 시선을 핸드폰으로 옮겼다. 휴대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휘적거리며 '젊은 앤 데 참 고단한 인생 같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서 현실을 견뎌보자고 다짐했지만 커피를 다 마신 후에도 의자를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노곤해졌다.
때마침 차임벨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렸다. 차가운 바람이 몰려와서 잠시 어깨를 움츠렸다. 아까 파란 셔츠의 그녀가 겨울 코트를 휘날리며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크 초콜릿 색의 검정 머리카락이 커다란 웨이브를 만들며 날렸다. 그제야 그는 밖에 있는 그녀의 얼굴을 커피숍 쇼윈도 안 쪽에서 넋 놓고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핸드폰과 저 발치 서있는 건물을 번갈아 보며 얼마간 서 있었다. 키가 참 크구나 생각했다. 미인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하는 모든 행동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방금 전까지 한 숨 쉬던 그녀가 무슨 결단이라도 한 것일까.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궁금증이 생겼다. 그녀가 시선에서 사라진 후에야 진혁도 회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다희는 이른 아침 커피숍에 들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구석진 코너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일의 시작을 알리듯 회색이 섞인 파란 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헝클어진 머리를 모아 등 뒤로 넘겼다. 노트북을 열고 뭐라도 해야 될 것 같아 영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10여분이 채 지나지 않아 문득 이런 삶이 너무 지겹다고 생각됐다. 그녀는 8번째 취업에 실패했다. 4년 전 대학입시를 앞두고 생각했었다. ‘일단 대학에 들어가야지.’ 대학만 들어가면 어느 정도 삶이 보장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아무 도그녀에게 전쟁터 같은 취업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 아니, 겪어 보기 전까지 누군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가 더 맞을 것이다. 머리도 자주 아프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날이 반복됐다. 어느 날은 희망에 가득 차 있다가도, 어느 날은 절망에 휩싸였다. 그렇게 절망에 휩싸일 때는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 보였다. 무거운 한 숨만 내 쉬며 소망을 가질 수 없는 것에 탄식했다. 이러다가 결국 이런 탄식이나 칭얼거림조차 사라질 까봐 두려워졌다. 노출 콘크리트로 된 천장을 바라보며. ‘저는요… 피곤하고 지치고성이 많이 나있고, 우울합니다!’를 마음속으로 외치고 머리를 푹 떨구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가볍게 찰랑 거리며 얼굴을 가렸다. 그 속에서 그냥 서럽게 울고만 싶었다.
가장 슬픈 영화나 드라마 혹은 책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그 순간에는 삶의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지겨웠다. 여차하면 그녀는 충분히 나쁜 결정을 할 수도 있었다. 아침에 마음에 드는 재킷을 걸치고 일터로 바쁘게 걸어가는 것이 그녀의 꿈이었다. 그런 그녀의 꿈이 너무 소박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뭐가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싶었다. 오른손으로 익숙한 듯 팬을 돌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턱을 괴고 앉아 창 밖을 바라보는데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여자가 순진하고 맑은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에서 괴리감을 느낄 찰나, 문자 한 통이 왔다.
‘1차 합격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2차 면접은 15일 수요일 10시입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주변에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면 점프라도 하고 싶었다. 면접 준비를 위해 다시 집으로 가야 했다. 쓰고 있던 노트북을 접고 커피숍을 나섰다. 문을 열자 새찬 바람이 불어서 입고 있던 긴 겨울 코트가 허리 위까지 날렸다. 합격 소식 때문인지 차가운 바람 때문인지 마음이 잔뜩 상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