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윤아, 나 언니가 없는 것이 조금 익숙해졌어. 꿈에서 언니를 만났어. 우리 둘 다 어린 나이더라고. 언니한테 그저 얘기하는 꿈이었어. 언니는 웃고만 있더라.”
“그래? 얼굴이 편해 보인다. 뭐라고 얘기했는데?”
“그냥 늘 고맙다고.”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6학년 때일까. 아빠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아지고 있었어. 어느 날부터는 아예 안 보이길래 언니랑 나는 아빠가 우리 집을 떠난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어.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셨다고 했지만 엄마의 절망을 우리는 알고 있었어. 누군가에게 전화할 때 남편이 떠났다고 말하는 걸 엿들은 적이 있어. 그걸 듣고도 난 모르는 척했어. 사실 진짜인가 싶었거든 믿고 싶지 않았나 봐. 그때부터 무슨 일이 생기면 난 모르는 척하는 게 버릇이 됐어. 그렇게 엄마의 슬픔을 지켜보면서 크는 건 잔인했지. 어릴때 난 엄마들은 다 그런 표정만 짓는 줄 알았거든. 엄마가 집에 밤 늦게 들어오는 것이 늘 싫고 화가났는데 그게 나 먹여 살리려고 그랬다는 걸 한 참 뒤에 알았어. 그걸 알아버린 날, 나는 빨리 커서 엄마를 좀 편하게 해주고 싶은 소망이 생겼어.”
“어머님이 힘드셨겠네.”
“그랬나 봐. 평생 보지도 않는 이모까지 부른 거 보면.”
“이모가 왜?”
“어느 날 미국에서 이모가 우리 집에 왔는데. 난 이모를 아주 어렸을 때보고 그때 처음 보는 거였지. 이모의 미모는 충격적이었어. 너무 예뻤거든. 이모는 엄마보다 한 살 밖에 어리지 않은데 열 살이나 어린것처럼 보였어. 정말 세련되고 우아해 보였지. 이모 덕분에 갑자기 우리 집이 더 누추해 보였어.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책과 빛바랜 커튼 그리고 어수선한 부엌이 다 미워 보였어. 우리 집에 있는 물건들은 종류대로 분류되어 있지 않았음을 그때 깨달았지 뭐야. 아니, 머리빗이 티브이 앞에 연필과 같이 연필꽂이에 꽂혀 있더라고. 하하. 이모는 드라마에나 나오는 부잣집에서나 돌아다닐 것 같았어. 이모는 엄마의 우는 소리를 한동안 들어주고 한숨을 길게 쉬었지. 마침 거실에서 왔다 갔다 하는 우리를 발견했어. 나는 왠지 그 미모 앞에서 내 자신이 누추해져서 창피하고 어색해 인사도 못하고 멀뚱히 서 있었거든? 그랬더니 나를 위아래로 쳐다보다가 엄마한테 하는 말이 ‘쟤는 어깨는 구부정하고 표정은 또 왜 저러냐 인사도 안 하고 멀뚱히 서있네.’였어. 그 얼굴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어. 나를 안쓰러움을 넘어 쓰레기 쳐다보듯 보는 그 시선과 비난의 말은 너무 저급해서 미모가 아까울 정도였다니까. 난 창피하고 기분이 나빴어. 어떻게 저렇게 배려 없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 할 수가 있지? 물론 인사도 안 하고 멀뚱히 서 있던 나도 잘한 건 없지만, 갑자기 외모 품평이라니. 나는 결국 인사를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어. 이모의 시선은 방으로 들어가는 나를 따라왔지. 그리고 ‘쯧쯧’ 혀를 찼어. 나는 그 찰나 이모의 눈에서 이상한 살기 같은 게 느껴졌어. 나는 그날 이모랑 절대 대화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어.”
“난 네가 예쁜데….”
나는 그녀의 맥락을 모르는 사람처럼 말했고 그녀는 나의 말을 안 들은 것처럼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이모가 하고 있는 모든 액세서리조차 이국적이었고 화려했는데 그것들이 어떻게 다 잘 어울리더라고. 잡지에 나오는 연예인 같았지. 하지만 이모 입에선 싸구려 정서가 느껴졌어. 교양 없는 말투와 어울리지 않는 패션. 그때 알았어. 이모도 남의 나라에서 꽤나 고생하고 있구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되겠다 했지. 이모는 알 수 없는 영어 단어를 섞어 가며 엄마에게 이야기했는데 그 부분에서 가장 큰 위화감을 느꼈어. 그게 너무 멋있어 보였거든? 방금 전까지 말도 안 섞겠다고 다짐했는데, 이모의 영어 단어를 들으면 그렇게 또 선망의 대상이 되는 거야. 이상한 감정이었어. 만약 내가 무결점의 외모를 가진 이모 앞에서 널브러지는 모습을 보였다간 이모가 채찍질이라도 할 것 같은 상상을 하기도 했어. ”
“근데 어머니가 이모를 왜 부르신 거야?”
“음….”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 먼 곳을 응시했다. 그리고 용기 낸 듯 한숨을 짧게 쉬더니.
“엄마가 우리를 파양 하려고 했나 봐. 미국에 사는 이모한테. 엄마가 부양할 수 없으니 미국에서 이모 밑에서 크라고. 미국에 있는 이모 집에는 방이 많다나. 그걸 언니가 엿듣고는 거실에 달려 나가더니 엉엉 울었어. 미국에 가지 않겠다고. 나는 그제야 정신이 번뜩 들었지. 여차 하면 미국에 팔려 나갈 뻔한 걸 언니 덕분에 막은 기분이었어. 엄마는 언니와 나를 안고 서럽게 울었어. 이모는 그런 우리를 보고 같이 훌쩍거리시더니 저녁을 드시고 나가셨어. 우리를 미국에 데려가지 않으셨지. 나는 이모에게도 딸이 둘 있는 걸 알아. 거기 갔으면 어쩔 뻔했니? 자기 자식과 비교하면서 계모처럼 굴었을게 분명해. 이모가 예뻐서 좋았지만 속을 너무 뻔히 알 수 있어서 싫었지. 언니가 엄마랑 이모 앞에서 울지 않았다면 나는 엄마랑 바로 헤어졌을 거야.”
“안 가길 잘했네. 널 못 볼 뻔했다.”
“맞아. 널 못 볼 뻔했지.”
“나중엔 엄마마저 집에 들어오지 않자 나는 언니를 엄마처럼 의지했어. 매일 우는 엄마도 같이 있어서 괜찮았는데 엄마는 우리가 싫었나 봐. 엄마가 떠난 걸 언니는 나에게 말하지 않았어. 난 언니를 엄마처럼 의지했지. 언니는 나와 항상 함께 있을 거야, 언니마저 떠나진 않겠지… 하고 말이야.”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언니가 없는 지금 그녀가 느낄 공허함을 나는 감히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