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해!”
10:00 루프 시작
팔등에 있는 타투의 숫자가 카운트다운하기 시작했다.
증거도 증거지만 운이 좋으면 이소연을 죽인 실제 범인을 찾을 수도 있다. 조금 막연했지만 분명 호미 기획사 안에 들어가면 뭐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마스크를 썼다. 회전문을 통해 호미 기획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홀 안에는 천장에서부터 내려오는 꽃잎 같은 조형물이 매달려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홀 안에 있었기 때문에 나 같은 낯선 사람이 들어가도 주목받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전에 김예지가 카피 해준 출입증을 찍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으로 수월하게 들어갔다. 사무실이 6층이라는 사실은 미리 알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리고 문이 열리자 나는 줄곧 땅에 떨구던 고개를 한 번 들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행이었다.
07:20
6층에서 사무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모든 문엔 안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작은 유리창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유리창 너머로 박실장과 김예지의 매니저가 컴퓨터 앞에서 CCTV 화면을 조작하고 있는 것을 포착했다. 그 CCTV다 내가 나온. 나는 이때다 싶어 핸드폰으로 그들의 뒷모습과 모니터 화면을 몰래 촬영했다. 누군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이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나자 나는 촬영카메라를 위로 향하게 한 다음 사무실 문 틈 바닥 아래로 놓았다. 그리고 재빨리 일어나 마침 지나가는 두 명의 사람들에게 고개를 까딱하며 자연스럽게 인사까지 했다. 그들이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후, 핸드폰을 다시 찾아들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등 뒤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박실장이 매니저와 얘기하며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내가 서 있는 곳에서 한 발자국 정도 더 뒤에 멈춰 섰다. 그들은 남이 듣지 못하게 조용히 속삭였지만 나는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바로 딥페이크 영상 작업을 위한 3층 녹음실 얘기를 하고 있었다. 녹음실? 녹음실이라면 목소리 녹음본을 카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곳으로 가야 한다. 나와 박실장, 매니저는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탔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들은 1층 버튼을 눌렀고 나는 4층을 눌렀다. 혹시라도 3층에 내렸다간 날 의심할지도 몰라 4층에서 내려 계단을 이용해 3층으로 내려갈 참이었다. 그들은 점심 메뉴로 햄버거와 국밥 사이에서 뭘 먹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고 내리자마자 핸드폰을 열고 아까 몰래 촬영한 CCTV 촬영 조작 영상을 확인했다. 음성까지 완벽하게 녹화되었다. 성공이었다.
05:10
아니나 다를까 3층엔 아주 큰 녹음실이 한 개뿐이었다. 그곳에는 분명 딥페이크 더빙파일이 저장되어 있는 컴퓨터가 있을 것이다. 나의 루머를 퍼뜨린 곳. 나는 무거운 문을 조심히 열고 아무도 없는 녹음실 안으로 들어갔다. 컴퓨터 마우스를 움직이자 화면이 켜졌는데 비밀 번호를 입력하라는 창이 떴다.
“씨발.” 나는 주먹으로 세차게 책상을 쳤다.
03:40
시간이 흘러도 컴퓨터 비밀 번호를 풀지 못했다. 나는 예지에게 문자를 보냈다. 혹시 녹음실 컴퓨터 비밀번호를 아는지. 하지만 그녀에게 답문이 바로 오지 않았다. 애가 타도록 천년만년 기다리는 것 같았는데 시간을 확인하니 1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녀가 알리가 없지’라고 생각할 즈음 지이이잉 하며 문자 진동 소리가 울렸다. 비밀번호는‘우리는 가족.’ 나는 다소 떨리는 손으로 조심히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극적으로 로그인이 되었다. ‘우리는 가족’ 좋아하네. 나는 서둘러 최신 파일을 열고 문제의 그 파일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복사를 시작하고 USB로 저장했다. 더빙이 녹음되는 과정에서 이소연 죽음의 진짜 범인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러게 말 잘 들었으면 죽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왜 갑자기 차로 뛰어 들어서는.
-뛰어들긴 뭘 뛰어들어, 형이 들이받았잖아.
-야. 조용해라.
이를 악 문 박실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면 됐다. 그때 복도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01:30
내가 서둘러 나가려고 하자.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김예지의 매니저와 마주쳤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나가려고 했지만 그가 나의 어깨를 잡았다.
“잠깐. 당신이 누군데 여기서 나와.”
그 잠깐 사이에 많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내 왼쪽 어깨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이 점점 오므라들기 시작하자 나는 재빨리 뿌리치고 무조건 복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거기서!”
거구의 그는 나를 따라오다가 숨이 찼는지 멈춰 서서는 전화를 걸었다. 건물 어딘가에 서 있던 경비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그때마다 빠른 달리기로 이리저리 뛰며 그들을 따돌렸다. 2층 화장실로 잠시 피신한 뒤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 밖에는 쿠션감이 있어 보이는 쓰레기 봉지 더미가 있었다. 나는 그냥 뛰어내렸다.
펑!
00:00
팔등에 타투는 없어졌다. 그리고 바로 현재로 돌아왔다. 나는 내가 구치소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국선 변호사가 나에게 오더니 음료수를 건네주었다. 조금 있으면 재판이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 양복이 이렇게 추리닝 같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후줄근하게 옷을 입은 국선 변호사님은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가 입은 것과 그의 외모는 해졌지만 눈에선 빛이 나왔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증거 영상 카피가 들어있는 USB를 확인했다. 나는 이것을 국선 변호사에게 넘겼다. 나에게 자동으로 지정된 국선 변호사님은 USB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한 참을 쳐다보다 셨다. 그런데 그는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웬일인지 유쾌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뭐야? 어차피 지는 게임이니까 막 한다 이거야?
“이게 뭐죠?”그는 생긴 것과 달리 아나운서 같은 둥근 목소리를 냈다.
“제가 입수한 딥페이크 영상 더빙 파일이에요.”
“오호! 어떻게 이런 걸….”
살이 통통하게 오른 동그란 얼굴에 웃상인 그는 논점에 허를 찌르는 말 같은 건 할 수도 없을 사람 같았다. 나는 짧게 한숨을 쉬고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나는 알 수 없는 마음으로 피고인 석에 천천히 앉았다.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힘들었는데 엄숙한 분위기의 법원은 눈을 번쩍 뜨게 했다. 변호사님 뒤로 멀리 앉아 있는 도진이를 발견했다. 도진이가 여기까지 와주다니 감동인걸? 그런데 도진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야. 이 와중에 반갑다고 웃는 거야? 변호사님이랑 미소 짓겠다고 짜기라도 했나. 여차하면 감옥가게 생겼는데 남일이라고 너무 한 거 아니냐! 여유 있는 저 미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