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란 건 김비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도영이 '이' 도영이라니. 최태수의 꼬리가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띠리리리링
그때였다. 도영의 전화가 다시 걸려 왔다. 민지는 겸연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핸드폰을 들고만 있었다. 지금 상황 정리가 되지 않는 만큼 휴대폰을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안 섰다.
“전화…. 받으시죠?”
“…. 네.”
민지는 수신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귓가에 댔다. 의외의 상황이었지만 나쁘지 않은 흐름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여보세요.”
“민지야 만날래? 내가 다시…”
“어 그래. 어, 거기서 보자. 오늘 밤? 응.”
도영이 말을 끝내기 전에 민지는 급하게 승낙했다. 평상시 그녀의 말투가 아니어서 핸드폰 건너로 들려오는 도영의 목소리도 당황한 느낌이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김비서는 회심의 카드를 꺼내기로 했다.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작은 물건 하나를 쥐고 왔다.
그가 그 물건을 그녀의 앞으로 살며시 내려놓자 민지는 놀라서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혜진의 립스틱이었다. 그 립스틱이 혜진이 늘 쓰던 것인 건 민지도 단번에 알아챘다. 그녀의 시그니쳐 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혹시 이게... 이게… 왜?”
“당신이 최태수에게 복수할 수 있는 증거요.”
김비서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그의 '지금부터 정신 차리고 잘 들어라'는 결현한 표정에 압도당했다.
그녀는 돌연 화색했지만 동시에 의아했다. 김비서가 왜? 마음속에 여러 가지 질문과 감정이 쏟아졌지만 말로 잘 표현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여긴 최태수의 사무실 아닌가.
“립스틱이요?”
민지는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누가 들을세라 절로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그런 그녀를 향해 김비서도 한 톤을 낮춰 말했다.
“도청장치요.”
“그런데 이게 왜……”
약 6개월 전 김비서는 하얀 머리 빚쟁이 아줌마에게 혜진의 스케줄 그러니까 최태수를 만나러 올 시간을 알려 주었다. 혜진을 일부러 만나게 한 다음 그녀가 늘 쓰고 다니는 립스틱을 똑같은 립스틱에 도청장치가 달린 것으로 슬쩍 바꿔 치길 할 작정이었다. 작전이 생각대로 되어만 준다면 그게 어떤 것이든, 최태수에게 사회적 죽임을 줄 큰 증거로 활용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물론 실패해도 괜찮았다. 아줌마와 마주칠 기회는 많고 여차하면 김비서가 사무실에서 자연스럽게 가방을 들어주면서 해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정말 똘똘하게도 이 아줌마는 그 일을 해내 주었다. 아줌마 말에 의하면 마치 자신의 플랜을 아는 것처럼 혜진이 자기 시야에 굴러 들어왔다고 했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그녀가 가방을 놓고 방심한 사이 바꿔치기에 성공했다.
이후로 태수와의 대화가 다 녹음되었다. 그들이 민지의 사업 아이템과 마케팅 전략을 모두 빼앗아 갔다는 정확한 증거.
“저.. 저.. 잠깐만요. 아… 아니. 여기서 얘기하고 싶진 않은데 밖에 나가서 얘기할까요?”
민지는 마치 운동장 한 바퀴를 전력 질주한 듯한 숨을 몰아 쉬었다. 갑작 스런 호흡 곤란에 김비서의 쏟아지는 이야기들을 멈춰 세워야 했다.
“저는 지금 여기서 사무실 지켜야 하고요. 퇴근 시간은 7시입니다. 사거리 커피숍에서 보실까요?”
“네..”
사무실 밖을 나온 민지는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김비서는 이도영이라는 사람이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조언했다. 최태수에게 이도영은 지울 수 없는 자격지심이라고.
민지는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다 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영아.”
“응 민지야.”
“지금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