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자유 분방해 보이면서도 해맑아 보였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부유한 집안 때문이었다. 물론 넘치는 센스도 한몫했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 달리 패션의 유행을 따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 아니었고 되려 주목이 될 만큼 세련 돼 보였다.
그런 그녀가 조금 창피할 법한 질문도, 모르면 모르는 대로 거침없이 했다. 그런 거침없는 행동이 이상하게도 좋았다. 겉 보기엔 감히 다가가지 못할 것처럼 차가운 도시 미를 가지고 있지만 막상 대화를 하고 보면 그렇게 털털할 수가 없었다. 그 점도 역시 재현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녀는 솔직했고 자신감 있었고 배려가 있었으며 재현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그녀의 집안 사정을 겸손하게 말하기도 했다. 진성의 노파심인 ‘재현의 가난’이 둘 사이에서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레아에게 그는 ‘생활력이 강한 남자’라는 것으로 어필이 되었다. 재현의 당당한 태도가 레아에게 신뢰를 준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렇게 불현듯 재현의 마음속에 들어왔다.
그들의 만남은 한 달에 서 너 번에서 일주일에 두 번 이상으로 잦아들었다. 진성, 재현, 레아가 셋이 만나는 경우는 이제 거의 없었다. 재현은 레아만 만났다. 그렇다고 자주 만나는 일은 없었다. 재현이 일을 해야 했기에 재현이 레아를 만나는 것은 물리적으로 시간의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재현의 삶에 의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다르고 색채가 느껴졌다. 부모님 빚 갚으랴 없는 집안 형편에 돈 좀 보태랴 정신없이 일만 하는 힘들고 지친 삶을 살다가 그녀와의 대화는 간만에 터지는 축구 경기의 골처럼 그렇게 신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와 같이 듣는 교양 수업 시간이 되면 재현은 유난히 외모에 신경을 썼다. 그는 스스로 최대한 자제했을 것이라고 했지만 진성이 보기엔 어디에 홀린 바보처럼 표정 관리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좋아하는 티를 팍팍 냈다고 한다.
맞다. 재현의 마음은 순식간에 그녀로 압도당했다.
그녀 생각에 과외를 하다가 피식 웃질 않나 대리 운전을 하다가 길을 놓쳐 헤매기도 했다. 그런 자잘한 실수에도 마냥 행복했다.
어느 날 진성이 늘 같은 자리에 앉아서 공부하고 있는 재현을 도서관에서 발견했다. 진성은 그에게 넌지시 다가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너네 언제 사귈 거야?”
화들짝 놀란 재현은 그 자리에서 진성의 멱살을 익살스럽게 잡았다.
“어어 웃네? 웃어? 이미 사귀는 중이야?”
“무슨 소리야.”
가방과 연필이 떨어지면서 조금 소란스러웠는지 조용히 공부하고 있던 몇몇의 학생들이 인상을 쓰며 주의를 주었다.
“나가자 나가.”
그들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라도 생긴 듯 키득거렸다. 부산스럽게 도서관 밖을 나오자 찌르는 5월의 햇살이 눈앞에 펼쳐졌다.
진성이 이제는 꽃잎이 떨어져 초록빛들로 변한 벚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재현에게 커피를 건네며 앉았다. 제법 더워진 날씨엔 역시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내가 누굴 사귄다고?”
“너랑 레아.”
“무슨 소리야. 아니야.”
“누굴 속이려고! 다 속여도 나한테 비밀이 있으면 안 되지 감히 네가.”
“참나…. 아냐.”
“아니라고?”
진성이 폭격이라도 맞은 듯 놀래서 물었다. 그의 표정은 놀란 것 반, 신이 난 것 반이었다. ‘간만에 신나는 얘기 거리라도 생겼다 이거지.’ 재현은 속으로 얄미워했다.
갑자기 흥분에 휩싸인 진성이는 드라마 미니 시리즈의 다음 편이 자기 예상 대로 되지 않기라도 하듯 괜한 떼를 쓰기 시작했다.
“야!! 고백은 했어?” 언성을 높였다.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재현은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무슨 고백….”
“너 걔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
“아이 씨.”
진성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발길질을 크게 하더니 허공에 대고 신경질을 냈다. 그는 재현이가 타이밍을 놓쳤다느니, 해야 할 말을 안 하고 딴 소리만 했다느니, 소심하다느니,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이럴 땐 이렇게 저럴 땐 저런 말을 해야 여자들이 좋아하는 거란다라며.
“내가 지금 이 처지에 누굴 사귀냐.”
“무슨 처진데 네가 지금.”
“나 일하느라 바빠. 연애할 시간이 있겠냐.”
그런 말을 실제로 내뱉고 보니 자신이 더 처량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홀가분해졌다. 진성에게 감추어 두었던 심정을 말할 수 있게 돼서 고마운 기분마저 들었다.
“레아는 기다리는 것 같던데.”
진성이 답답한 마음에 그렇게 내뱉었다. 재현이 심란한 표정이 되자 진성은 진성의 어깨를 두드린 뒤 자리를 비켜 주었다.
‘기다린다고? 뭘? 나의 고백을? 난 아직 시간이 없잖아. 내가 레아를… 좋아하는 건 맞지? 걔가 나를 좋아하는 건 맞나? 우리 집 월세는? 아빠 빚은? 알바며 학교는….? 내가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지. 난 그럴 자격이 없잖아. 누굴 사귀고 할 형편이 못 된다고. 내가 감히 누굴 좋아하고 밥을 사주고 선물을 사주고 사랑을 해주고 연애를 하냔 말이야.
'너 지금 미쳤어?’ 재현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얼음만 남아 있는 투명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컵을 손아귀 안에 잡고 구겨버렸다. 얼음은 사방으로 튀었고 햇살에 못 이겨 바로 녹아 버렸다. 재현의 시작도 못해본 그 사랑이 그렇게 녹아 없어져 버릴 것 같았다.
어느새 짙어진 풀잎들은 재현의 시끄러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더 싱그러운 향기를 발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랑을 이어가지 못하는 슬픔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환경에 대한 억울함이었다. 그랬다. 억울했다. 그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다가온 사랑 하나 못 챙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