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나 벌자.’라고 생각한 재현은 과외하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초인종을 누르자 무거운 철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그는 천천히 으리으리한 집에 입성했다. 문을 열고도 마당을 지나 현관으로 가야 하는 대궐 같은 집이었다. 어느 때보다 위화감을 느낀 재현은 무거운 마음에 굳어진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선생님 오늘은 좀 힘들어 보이시네요.”
학생은 엄마가 간식으로 내온 빵을 우걱우걱 씹으며 전혀 위로하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민성아 네가 몇 학년이지?”
“저요? 고2.”
“넌 돈 때문에 힘들었던 적 없었지?”
“음….”
그는 한 참을 생각하더니 중학교 때 아이들에게 셰이크를 쏘겠다고 카페에 갔다가 엄카가 정지 당해 결제를 하지 못했던 적이 있는데 그날 친구들 앞에서 그게 그렇게 쪽팔렸다고 했다. 친구들이 ‘너네 집 괜찮냐’며 조롱하는 듯한 말로 걱정 아닌 걱정을 해줬는데 한 대 패주고 싶었다며 솜털 같은 주먹을 공중에 휘둘렀다. 그 얘기를 하는 와중에도 그는 하나도 무섭지 않게 인상을 찌푸렸다. 엄카가 정지당했던 건 중간고사를 못 봐 엄마가 정지시켜 놓은 것이었다.
“하….”
“왜요 선생님?”
“아니야 책 펴봐.”
재밌는 수다라도 기대했던 민성은 한숨을 쉬며 언어 교과서를 천천히 폈다. 그날따라 민성이 만큼 일하기 싫은 건 재현도 마찬가지였다. 책을 열자 한용운의 님의 침묵 그리고 그 옆 페이지엔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가 쓰여 있었다.
‘이런…’
가난한 사랑 노래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법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봄에 와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눈으로 따라 읽은 그 시를 보자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재현은 이를 악 물었다. 지끈 두통이 밀려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감정을 최대한 밀어 넣었다. 말하는 이의 정서와 상황, 사회 문화적 배경 등을 공책에 사무적으로 받아 적는 민성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런 정서를 외워서 문제를 맞히면 그걸로 행복할 나이구나 넌.’
지이이잉지이이이잉
진성의 이야기를 멈추게 한 건 남편의 전화였다. 나는 남편에게 오늘은 좀 늦을 것 같다며 먼저 자라고 빠르게 말한 다음 진성의 이야기 속으로 다시 뛰어들고 싶었다.
징징징지이이이잉
그때 눈치 없이 다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진성의 아내였다. 아내라고? 일본에 있는 그 아내?
같은 대학교에서 만났고 이 친구도….
“아니 그런데 주하도 레아 친구였어?”
혹시나 하는 예감에 머리가 번쩍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퀴즈의 정답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양손 주먹을 꼭 쥐었다.
“.. 응? 어. 그렇지, 잠깐만.”
그가 잠깐 전화 통화를 하겠다는 표시로 검지 손가락을 펴 보였다. 주하에 대해서는 재현이도 자주 언급을 했었다. 진성이가 몇 년을 쫓아다녀 겨우 사귄 친구이고 결혼에 골인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나까지 그럴 필요 없는데 시어머니한테 의례상 하듯, 때 되면 만나서 커피 마시고 명절엔 선물도 사 오는 예의 바른 아이이다. 그 아이에게서 레아 이야기는 전혀 들은 적이 없었다.
진성은 주하가 일본에 잘 도착했으며 방금 친구들과 쇼핑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다고 했다. 안부 전화를 한 것이다. 진성이가 재현네 할머니 집에서 나와 수다 떨고 있다고 하자 주하는 자신도 이곳에 오고 싶다고 하는 간드러진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그리고 주하는 진성에게 재현의 새로운 여자 친구는 어떻냐, 예쁘냐, 성격은 좋아 보이냐 등을 간략하게 물어보았다. 그들은 서로 좋은 시간 보내라고 말한 후 세상 쿨하게 전화를 끊었다.
“주하는 좋겠다. 남편 잘 만나 여행도 다니고.”
나는 진심으로 부러워 볼멘소리를 했다. 진성이는 아저씨처럼 너털웃음을 지어 보이며 나도 나중에 일본에 보내주겠다는 거짓말을 능청스럽게 했다.
“아니 근데 주하도 레아 친구였냐고.”
“어어. 어?”
“주하가 레아 친구였냐고.”
뭐야. 못 들은 척하는 거야, 딴생각하는 거야. 나는 진성의 당황하는 얼굴을 재빠르게 캐치해 냈다. 내 질문이 그렇게 예리하고 골수를 쪼갤 만큼 치명적이었나, 나는 월척을 잡았나 싶어 끈질기게 물었다.
“아. 그럴걸?”
“그럴걸?”
“아 응. 아 알지. 걔네 둘이. 재현이랑 사귀었던 여잔데 그럼 모르겠어? 같은 학교에 같은 동아린…. 데.”
그가 아차 싶었는지 말끝을 흐렸다. 같은 동아리라. 한 편의 드라마가 쓰일 만큼 지지고 볶았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오오 그래? 흥미진진 바라바라.”
“뭐가 흥미진진이래…”
나는 졸음이 벌떼처럼 몰려오다가 갑자기 후다닥 도망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