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가 다가왔다. 모두들 과제며 밀린 공부를 하느라 도서관은 만원이었다. 재현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밀린 과제를 해내느라 하루하루 겨우 살고 있었다. 모든 과목을 패스할 지도 의문이었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집중했다. 도서관에서 산처럼 쌓아 놓은 전공 책들 사이에서 공부하는 그의 모습은 자주 발견되었다. 진성과 레아도 마찬가지였다. 재현은 도서관을 오가며 가끔 레아와 마주쳤다. 레아를 볼 때마다 그의 얼굴은 화색이 돌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기말고사를 위해 응원을 해주는 것 외에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재현과 레아에게 진성은 잠시 머리를 식히자며 커피를 들이밀었다. 머리를 너무 많이 굴려서일까. 그들은 아무도 바라보는 것 같지 않은 눈을 하고 한 참을 앉아 간간히 부는 초여름 바람을 느꼈다.
“마지막 시험이 언제야?”
“다음 주 수요일. 넌?”
“나도.”
“난 목요일.”
진성이 어울리지 않게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너 요즘 뭐가 많이 힘들어? 공부가 잘 안돼?”
“공부는 무슨. 공부야 하면 되고 안되면 마는 거지…”
“근데? 그럼?”
“그게…”
그가 말을 하다 말고 레아 뒤에 몸을 웅크렸다. 숨겨 지지도 않은 몸뚱이로 가냘픈 레아 뒤에서 면 빠지게 저러는 꼴을 재현은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그가 누군가로부터 숨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반대편을 돌아보자 김주하가 도서관 안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짧은 단발머리에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녀가 든 가방은 그녀만큼 커서 가방을 멨다는 표현보다는 지고 간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김주하?”
레아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재현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꽤나 흥미로운 징조였다.
“어울리지 않게 짝사랑이나 하고 순수한 놈일세.”
재현이 말하자 진성이 오죽 답답했는지 정말 어울리지도 않게 깊은 한숨을 몰아 쉬었다. 그들은 오래간만에 웃으며 진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공부나 하자, 일단 기말이나 끝내자며 다시 도서관에 들어갔다. 그렇게 폭풍 같은 2주가 지나고 모두 여름 방학을 맞이했다.
방학이 되자 재현은 더 많은 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레아를 만나는 일은 자연스럽게, 현. 저. 히. 줄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낮 시간에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더 추가했고 일주일에 쉬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주말 초저녁 시간이 비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바쁜 와중에도 레아 생각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지 않는 날이 많아질수록 그리움은 더 커져만 갔다. 동시에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무것도 결정 내릴 수 없는 자신이 점점 미워졌다. 어느 날은 ‘내가 무슨 주제에 연애냐.’라며 정신없이 일하는 것에만 집중하는가 하면 어느 날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입맞춤하고 싶었다. 그러면 ‘우리가 그 정도 사이는 아니지 않나.’라고 말할 것 같은 레아의 무표정을 상상하며 빈 페트병을 구겨 자신의 머리를 쳤다.
“저기…”
“아 네. 주문하시겠어요?”
“아. 아. 두 개요.”
재현은 그날도 습관처럼 구긴 빈 페트병을 뒤로 숨기며 프로페셔널하게 계산대 번호를 눌렀다.
“어? 재현 선배?”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킨 여성분이 재현을 알아보았다.
“어? 주하?”
“여기서 일해요?”
마침 손님도 별로 없는데 재현은 잠시 수다 좀 떨고 싶었다. 아니 레아 생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어 낮에는 여기서 일해. 오랜만이네. 방학인데 뭐 해?”
“저 다음 주에 미국가요.”
“미국? 여행?”
“음… 뭐… 그런 셈?” 그녀가 까만 안경 안에 동그란 눈을 굴리며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런 셈은 뭐야?”
“여차 하면 눌러앉을 수도 있고.”
“정말? 왜?”
“미국 간호사들은 한국 보다 더 좋은 페이를 받는데요. 미국으로 학교를 옮겨서 살아보라는 미국 고모의 제안을 받아들여볼까 하고요. 게다가 전 지금 미국병이 걸려서.”
“미국에 고모가 사시는구나. 그럼 유학…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거야?”
“네.”
‘아니 잠깐!’ 재현은 갑자기 진성을 떠올리며 조바심을 냈다. 진성이 주하를 짝사랑하고 있는데 말이다. 물론 재현이 알기론 진성은 한 여자를 오랫동안 좋아해 본 적도 없고 사귀어도 석 달 이상 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짝사랑은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번 더 잠깐. 그래도 물어나 봐야 하지 않을까’와 ‘에잇 관 두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졌는지 주하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재현을 바라봤다.
“선배?”
“어, 왜.”
“그 표정으로 아무 말 안 하고 있길래요.”
재현은 입 모양으로 ‘아에이오우’를 만들며 급하게 놀란 얼굴 근육을 풀었다.
“아, 어, 근데 너 진성이한테는 말했어? 너 미국 가는 거.”
“진성 선배요? 제가 왜 그 선배한테 말해야 해요?” 그녀는 조금 수상하게 발끈하느라 얼굴을 조금 붉혔다.
“어 그래도 가… 같은 동아리니까. 어. 어 근데 이상하다. 너 간호학관데 우리 경영대 동아리네?” 북받친 감정이 섞인 그녀의 목소리에 한껏 겁먹은 재현이 말을 더듬거렸다.
“복수 전공이요.”
“오오 이과 문과를 동시에. 음. 음.”
티를 내지 않을수록 더 티가 나는 것 같아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 그는 일순간 미간을 찌푸리고 손가락으로 진열대 위를 가볍게 두드리더니 아차, 커피! 하고 뒤돌아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