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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여름 Nov 03. 2023

가방의 무게

가방의 무게가 삶의 무게는 아니다



“순례길 가보고 싶다.” 

최근에 달리기와 걷기를 열심히 하는 남편이 말했다.

“갑자기? 나도 예전에는 가보고 싶었어.”

오래전에 품었던 버킷 리스트였다. 그러나 순례길 보다는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좋지. 근데 짐은 어떻게?’

어딜 가건 짐이 많은 내게는 생각만으로도 힘든 여정이 펼쳐졌다. 

걷는 건 괜찮지만 짐을 챙기는 건 두렵다.


어딘가를 갈 때 한숨부터 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나다. 떠나는 즐거움보다 더 큰 것은 짐 싸기다. 

필요한 게 곁에 없으면 느껴지는 불안함. 나만 그런 걸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물품을 꼽자면 청소용 돌돌이와 멀티탭, 고데기다. 

집에서는 물론 숙소에서도 머리카락이 보이면 못 참는 성격에 침대와 바닥 등 어디에나 쓱쓱 밀고 다닌다. 

어두운 옷을 입었을 때도 쓱쓱. 돌돌이는 만능 발명품이다. 

게다가 여행 관련 나만의 원칙이 있다. 머물렀던 숙소에서 나올 땐 처음 있었던 그대로의 상태로 하고 나와야 마음이 편하다. 잘 지내다가 간다는 의미를 부여하며 의식을 행한다.

그때도 꼭 필요한 게 돌돌이다. 침대에 있는 베개를 가지런히 원래 위치대로 놓고 이불을 구석구석 돌돌이로 밀어준 뒤, 반듯하게 각을 잡아 정리한다. 세면대와 바닥의 물기를 닦고 떨어진 머리카락도 치운다. 

그리고 사용한 수건은 한쪽에 접어둔다. 문을 나서기 전까지 몇 번을 더 확인하고 마지막에 돌아서서 보면 처음 숙소에 들어왔을 때가 되어있다. 이 정도면 됐다 싶으면 끝이다. 돌돌이는 큰 역할을 한다.

멀티탭은 새로운 장소에 갔을 때 콘센트 위치가 제각각이라 필요하다. 고데기 사용뿐 아니라 아이패드 충전 등 낯선 곳이지만 내가 사용하기 좋은 위치에 있어야 편리하다. 고데기는 없으면 절대 안 되는, 돌돌이보다 더 중요한 아이다. 옷이 구겨진 걸 싫어하는데 머리도 마찬가지다. 평소 고데기를 종류별로 다양하게 스무 개 정도 갖고 있다. 웬만한 미용인보다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중 여행에서 필요한 고데기 두 개를 챙긴다. 

숙소에 어떤 드라이가 있는지 미리 알아보고 마음에 안 들면 드라이기도 추가한다. 

이렇게 챙기다 보면 자잘한 것들이 모여서 큰 몸집이 되어버린다. 결국에는 이 모든 게 다 짐이 된다. 

여행이라는 말이 무색하리만큼, 나는 낯선 곳에서도 익숙하고 싶다.


얼마 전 보게 된 유튜브 채널 ‘조현아의 목요일 밤’에서 가수 에스파의 윈터가 나왔다. 

여행 갈 때 짐이 많다는 얘기가 나오길래 자연스럽게 귀가 쫑긋해졌다.

 ‘그래, 나랑 비슷한 사람들 있다니까.’ 바리바리 싸가야 안심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나는 그때도 짐이 많은 아이였다.

3박 4일 중에 3켤레의 운동화를 가져온 나를 보며 놀라워한 친구들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옷에는 이 신발인데?” 멋에 관한 대단한 관심보다는 입던 옷에 늘 신던 신발이 있어야 했다. 

단지 평소처럼 입을 생각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봐도 답답하고 융통성이 없다. 

그걸 전혀 이해 못 하던 친구들은 “아니, 대충 하면 되잖아.” 했다. 그때 처음 알았다. 

‘아, 대충. 그럴 수도 있구나.’ 진심으로 몰랐다. 지금은 알게 되었지만 그럼 뭐 하나. 

그건 나에겐 해당이 되지 않는다. 여전히 짐이 많은 걸 보면.

긴 여행은 챙길 게 더 많아서 힘들다. 여행을 떠나기 전 짐을 싸다가 울고 싶을 때도 더러 있었다. 

떠나기 직전까지 챙기다가 퀭한 얼굴이 되었다.

떠나는 사람의 들뜬 생기 있는 얼굴 대신, 여행에서 돌아오는 사람 같은 피로감 가득한 얼굴로 떠났다. 

나는 대체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사는 걸까 하면서.


캐리어는 언제나 가득 찬다. 마지막까지 챙기고 잠글 때 캐리어 위를 무릎으로 눌러가며 잠근다. 

그리고 보조 가방 안에 부족한 것들을 챙기곤 한다. 혹시 모르니 무릎담요, 아이패드, 물티슈 등등. 

여행은 짐 싸기로 시작해서 짐 풀기로 끝이 난다. 돌아와서도 바로 짐부터 풀어야 쉴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랬다. 가방의 무게가 삶의 무게라고. 정말 그런 거라면 내 삶이 너무 무거워진다.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는 예수님처럼 나의 짐 가방을 삶에 비유하고 싶지 않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지. 

그나저나 애초부터 순례길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고데기 못 가져가잖아.




가방의 무게는 가방의 무게일 뿐 삶의 무게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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