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할 수도 있지!
‘예민한 사람들’이란 썸네일에 혹해서 한 영상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거 뭐야? 너무 나에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예민한 사람은 특별한 거예요”
비록 유튜브 영상으로 만난 선생님이었지만 할 수만 있다면 ‘좋아요’ 100개는 누르고 싶었다.
곧바로 영상의 링크를 엄마한테 카톡으로 보냈다.
‘이 영상 봐봐요. 너무 내 얘기야.’
엄마는 영상을 보고 답변을 보냈다.
‘정말 진아 이야기더라.’
그러면서 그동안의 나의 예민함을 이해할 수 있겠다고도 덧붙였다.
예민하다는 게 단점으로만 여겨져서 움츠러들었던 때가 많았는데 ‘미운 오리 새끼 탈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미운 오리’라는 말은 엄마한테 상처로 받아들여졌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미운 오리 새끼로 알고 살았다니….’
엄마의 메시지를 받았을 때 오해가 있음을 감지했다.
언제나 당당했던 엄마는 부쩍 의기소침할 때가 있고 상처도 잘 받는다.
그걸 알면서 나는 투덜거렸다. 분명히 그날 밤 속상해하고 힘들어할 엄마를 알면서도.
“얘가 왜 이렇게 예민해?”
어릴 적부터 자주 듣던 말이다. 특히 소리와 냄새에 좀 더 민감했다.
내 귀에는 거슬리게 크게 들렸고, 냄새도 그러했다. 지금도 사람 많은 곳은 냄새로 힘들어한다.
가족들은 나를 이해할 수 없었기에 “예민해.”라는 말을 빈번하게 했다.
좋은 말도 아닌데 들을수록 예민하다는 말은 상처가 되었다.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고, 이상한 사람 같았다.
그래서 집에서는 온갖 예민함을 다 표출했지만 밖에 나가서는 달랐다.
‘예민함? 그게 뭐죠?’하듯 잘 숨기며 살았던 것이다.
성인이 되고도 한참 뒤 어느 날, “예민한 건 좋은 거예요.”라고 말해준 사람이 있었다.
레슨을 받았던 피아노 교수님이었는데 음악은 예민함이 있어야 더 좋은 거라고 했다.
그날, 처음으로 예민한 사람의 장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후로도 예민함에 대해 이전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유튜브 영상들도 찾아서 봤다.
한 번 보게 된 예민함의 알고리즘은 계속해서 비슷한 영상들을 보여줬고 손은 이끌리듯 클릭했다.
평소에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감정 몰입해서 잘 울기도 했는데, 이 또한 예민함이 가진 공감 능력이었다.
감정 기복이 있어서 날씨나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수 있다고도 했다.
여태 예민하다는 게 너무 싫어서 스스로를 미워하고 마음에 안 들어 했던 시간이 꽤 길었다.
이제는 예민함을 특별함 쪽으로 발전시켜 보겠노라고 다짐해 본다.
예민한 사람 중에는 성공한 사람도 많다던데. 그럼 나도 한번 되어보겠노라고.
엄마와의 냉전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전화 통화를 하는데 엄마는 이미 쿨하게 다 잊고 계셨다.
'그럼 그렇지, 소심한 나만 언제나 힘들지.' 약간의 허무함이 밀려왔지만 그런 엄마가 좋아서 웃음이 났다.
나는 예민함에 대해서 나름의 깊은 성찰을 한 것 같지만 언제라도 돌변할 수 있는 사람이다.
평생을 예민한 사람으로 살아왔는데 뭐. 그러면 어떠하리. 예민해서 그런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