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여름 Dec 04. 2023

글 안에 나 있다

자기를 닮은 글을 쓴다



오래전 드라마가 된 ‘파리의 연인’의 명대사 중에는

“이 안에 너 있다.”가 있다. 오글거리는 대사인데 어쩜 배우는 눈 하나 깜빡거리지 않고 진지했다. 그런 고백이 어디 있을까?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다. 그런데 비슷하게 글 속에는 내가 있다. 사람들은 자기를 닮은 글을 쓴다. 그래서 글은 솔직하게 썼을 때 더 와닿는다.


글쓰기 수업 때, 완성되지 않은 글을 마감 때문에 어찌어찌 제출하면 속이 상했다. 마감을 지켰다는 걸로 위안이 될 수 없었다. 일주일에 한 편의 에세이를 쓸 수는 있지만 완성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 정도면 됐어.’라는 글을 제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글쓰기 수업이 끝나면 뭔지 모를 허무함이 밀려왔고 그날은 잠을 잘 이룰 수 없어서 하는 거 없이 새벽까지 깨어있었다. 잘 쓰고 싶다는 욕심과 스스로 꽁해 있는 시간이 많았던 건,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답답함 때문이었다. 합평 시간은 늘 긴장되고 쪼그라들어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대신 나는 다른 사람의 글에 대한 쓴소리는 거의 하지 않았다. 글을 쓰고 싶어서 모인 사람들인 걸 뻔히 알면서 굳이 사기가 꺾이는 말은 되도록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글을 쓰고 완성하고 제출하기까지 노력의 시간을 알고 있는 처지끼리 가타부타 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합평 수업이니까 글쓴이에게 필요한 첨언은 꼭 해야만 했다. 혹시라도 쓴 말이 될 것 같은 부분은 질문으로 바꿔서 말했고 좋은 문장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말은 빼도 되지 않을까요?” 이런 말을 감히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분들도 있다.)

“여기서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봤는데요.” 이왕이면 도움이 될만한  의견을 말하는 쪽이 더 편했다.

다른 사람의 글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어서  내 글의 첨삭이 아님에도 내 글인 것처럼 열심히 받아 적었다.

수업이 진행될수록 신기하게도 글은 점점 각자의 얼굴처럼 드러났다.


비단 글쓰기 수업이 아니고도 모두가 글을 쓰는 세상이다. 짧게는 카톡의 한 줄 상태 메시지도 있고 인스타그램에서도 글을 올린다. 가까운 이의 깊은 한숨과 처연함이 느껴지는 글을 읽으면 속으로 조용히 응원한다. 알아주길 바라면서도 몰랐으면 하는 마음이 전해져서 아는 척은 금물이다. 그럴 땐  ‘지나갈 거예요. 반드시’라고 멀리서 전해본다. 섣부른 위로는 안 하느니 못하니까. 이래서 글은 숨길 수가 없다. 결국 자신을 나타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얼굴인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닮은 글을 쓰는 것일 테고.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건 백설 공주님입니다.”

백설 공주 이야기에서 거울은 매번 똑같이 솔직하게 왕비에게 말한다. 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숨길 수 없는 솔직함이 다 드러나는 진실의 거울처럼.

글에 힘을 믿으면서도 글처럼 무서운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글을 쓸수록 ‘나는 어떤 사람이지?’란 궁금증과 의문만 늘어간다. 모르겠으니 일단 쓴다.

쓰면서 찾아가는 게 지금으로서 최선의 방법이다. 솔직한 글쓰기는 솔직함이 준비되었을 때 쓰면 되는 거고, 알 듯 말 듯 모르는 글도 지금이 그렇다면 쓰면 된다. 글 쓰는 사람들 모두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글쓰기가 어렵지만 얼마나 멋진 일인지 써본 사람은 알 것이다. 글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준다.  

‘글 안에 나 있다.' 이것만 기억하면 되지 않을까?






글 안에 나 있다 (이 안에 너 있다 처럼)





작가의 이전글 나의 새벽을 방해하지 마시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