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 코코아

그리울 때도 코코아

by 봄여름


설탕 가루처럼 쏟아지는 눈이 내릴 때면 코코아가 생각난다. 어린 시절, 겨울에 대중목욕탕을 다녀오면 엄마는 코코아를 타주셨다. 젖어있는 파마머리와 내복 차림으로 언니랑 조심스럽게 후후 불어서 마셨던 기억이 오래도록 남아있다. 항상 다 마시지도 못하면서 코코아를 좋아했던 건 따뜻함과 달콤함, 겨울의 분위기 때문이었을 거다.


코코아를 마실 때면 어김없이 추워진 날씨였다. 일곱 살 때였을까, 엄마는 운전면허증을 따기 위해 운전학원에 다니셨다. 따라갔던 내게 잠깐 기다리고 있으라며 자판기에서 코코아 한 잔을 뽑아주셨다. 차가 담긴 종이컵을 들고서 얌전히 앉아 있었는데 잘못해서 그만 손에 엎고 말았다. 다행히 어느 정도 식어서 뜨겁지 않았으나 쏟아진 코코아가 손에 끈적거리는 게 싫어서 울상을 짓고 있었다. 엄마가 돌아와서 손을 닦아주시고 자판기에서 코코아를 새로 뽑아주셨지만 어쩐지 두 잔 째는 마시기 싫었다. 뜨뜻한 코코아를 내 손에 쥐여주는 엄마랑 둘이 있는 시간이 더 좋았다. 언니가 없는 틈에 엄마를 독차지하는 것 같아서였다.


이번 겨울에는 예상치 못한 이른 눈이 왔다. 그 후 한참을 눈 소식이 없더니 요 며칠간 눈이 내렸다. 베란다 창밖으로 내리는 눈 구경을 좋아하는데 눈이 멈추면 동네 아이들이 나타나곤 한다. 유년 시절에 나도 눈이 내리면 기뻤다. 밖에 나가서 놀아도 된다는 허락과 함께 엄마는 장갑과 목도리, 모자로 나를 무장시켰다.

“갑갑해~. 싫어~.”

“감기 들면 안 돼.”

잔뜩 껴입고 나와서 아는 언니 오빠들과 눈놀이에 푹 빠져 놀고 있으면 우리 언니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러다 눈사람을 만들 수 있는 큰 눈덩이를 짠! 하고 보여주며 나타났다. 부러웠던 나는 금손 언니를 따라서 눈을 동그랗게 뭉쳐보았지만 내 손에서는 계속 부서졌다. 한참을 놀다가 장갑이 다 젖어서 손가락이 시리고 아프면 집에 들어가곤 했었다. 놀이터에서 꺅꺅 거리며 노는 어린이들을 바라보며 '나도 저만할 때가 있었는데.' 하고 새삼 세월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아이들을 가르칠 때 '코코아 데이'를 지정하기도 했다. 피아노 연습이 끝나고 이론 공부 시간에 코코아를 타주면 아이들이 좋아했다.

"선생님, 우리 코코아 왜 먹는 거예요?"

"응. 원래 눈 오는 날에는 코코아를 먹는 거야."

뭔 말인지 잘 모르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들은 대부분 어엿한 고등학생, 또는 성인이 되었다. 나 역시 엄마가 안 챙겨줘도 겨울이면 발열 내의와 목폴라 없이는 외출을 안 하는 어른이 되었다. 정말이지 추운 건 세상에서 제일 싫다.


또 눈이 내리던 날, 그치고 나서 카페에 갔다. 자주 이용하는 스타벅스인데 매일 문전성시인 곳이 모처럼 한가로웠다. 이제는 코코아 보다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글도 썼다. 중간중간 창밖으로 눈 쌓인 풍경을 보면서 겨울의 낭만을 느끼던 중 누군가가 만든 눈사람을 발견했다. 마지막으로 만들었던 눈사람이 언제였는지를 떠올려보았다. 그러자 우리 자매가 눈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비디오로 찍던 아빠의 다정함이 생각나서 코끝이 찡했다. 코코아처럼 진하고 달달한 추억들 속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 갑자기 코코아 마시고 싶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당장 쿠팡에서 코코아를 구매했다. 눈 오는 날이 아니어도 코코아를 마실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앞으로는 그리운 날에도 코코아를 찾겠지.




1485417.jpg 눈 오는 날에는 코코아, 그리울 때도 코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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