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온도, 37.5도와 36.5도 사이

지독한 감기 끝에 다시 공주가 되었던, 짧고 다정했던 사흘의 기록

by 봄여름


오랜만에 감기에 호되게 걸렸다. 처음 목이 따끔거렸던 날은 지난주 일요일, 영화를 보러 가기 전이었다. 요즘은 일부러 마음을 먹지 않으면 영화관을 잘 찾지 않지만, 그럼에도 예외처럼 몸이 움직이게 되는 영화가 있다. 큰 화면과 3D 안경을 써야 제맛일 것 같은 이야기. 그 기대를 품고 남편과 데이트 겸 집을 나섰다.


점심을 먹고 영화관으로 향했는데, 너무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어중간하게 시간이 떠버렸다. 커피 한 잔 마시기엔 적당했지만 하필 날씨가 유난히 추웠다. 상영관 근처 상가는 공실이 많아 썰렁했고, 겨우 찾아 들어간 카페는 실내 온도가 밖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문을 마치자마자 곧 문을 닫는다는 안내가 돌아왔다. 영화 시간은 네 시 반인데 네 시에 문을 닫는다니. 잠깐 앉아 있다 나가면 되겠지 싶어 괜찮다고 했지만, 한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겉옷조차 벗을 수 없는 냉기 속에서 몸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를 느끼며 버틴 시간이었다.


이어진 영화관도 마찬가지였다. 난방을 전혀 하지 않는 동네인가 싶을 만큼 상영관 안은 계속 서늘했다. 세 시간 가까운 상영 시간 내내 겉옷을 입고 있어도 전혀 답답하지 않을 정도였다. 영화 <아바타>는 재미있었지만, 추위는 오래 남았다. 이후 몸에 이상 신호가 오더니 결국 몸살로 이어졌다.


다음 날 병원에서 인후염 진단을 받고 약을 처방받았다. 약을 먹으면 금방 나을 줄 알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더 아팠다. 열이 나고 몸에 힘이 빠져도 약 기운으로 버텨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틀 뒤 다시 찾은 병원에서는 새벽에 미리 먹은 해열제 탓에 체온이 독감 판정 기준인 37.5도를 간신히 밑돌았다. 증상은 맞는데 처방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한 진단을 안고 돌아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앓는 것뿐이었다.


그날 밤, 오한이 들고 열이 오르며 상태가 눈에 띄게 나빠졌다. 남편이 급하게 얼음주머니를 만들어 이마에 올려주었고, 근처에 사는 엄마와 언니가 달려와 나를 친정집으로 데려갔다. 결혼 이후 엄마 집에서 자는 건 처음이었다. 가깝게 산다는 이유로 그동안은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었다. 침대에 누워 쉬고 있는데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랑이가 현관 앞에서 엄마만 찾고 울어.”

급기야 강아지 사랑이까지 합류하며 나의 호화로운 병간호가 시작되었다.


며칠 동안 나는 다시 예전처럼 ‘공주’가 되었다. 누워만 있어도 되었고, 싱크대 근처에는 갈 일조차 없었다. 차려진 밥을 먹기만 하며 침대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아프니까 이런 시간도 오는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아프다는 건, 잠시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아도 되는 허락 같았다. 크리스마스에 아픈 건 처음이었지만, 저녁에는 남편과 엄마, 언니가 모여 배달 음식으로 작은 파티를 열었다. 대단한 건 없어도 이상하게 훈훈한 밤이었다. 늦게까지 영화도 보고 수다도 떨며 즐겁게 보냈다. 남편은 결혼하고 처음으로 사흘을 혼자 보냈다. 나와 사랑이가 없는 집에서 나름의 자유를 즐겼을 것 같지만, 본인은 절대 아니란다. 믿기지 않지만 일단 속아주는 척하기로 했다.


사흘간의 공주 생활을 마치고 우리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화장실 청소부터 시작했다. 고무장갑을 끼는 순간, 비로소 ‘나’라는 일상으로 복귀했음을 실감했다. 공주 놀이는 짧지만 강렬했고, 화장실 바닥의 물기처럼 일상은 다시 차갑게 돌아왔다. 그리고 이번엔 남편이 아프기 시작했다. 나에게서 옮은 감기였는지 끝내 열이 나고 얼음찜질을 해야 했다. 이틀 정도 함께 골골거리다 회사도 하루 쉴 정도로 상태가 나빠졌고, 나를 간호해 주던 엄마까지 결국 감기에 걸리셨다. 다행히 언니만 무사했다.


크리스마스가 훅 지나가고 한 해의 끝이 코앞인 오늘, 우리 가족은 다 같이 골골거리고 있다. 예년보다 훨씬 조용한 연말을 맞이하게 될 것 같다. 어쩌면 또 배달 음식으로 소박한 파티를 하게 되지 않을까. 이럴 수도 있구나 싶지만, 몸이 아프고 나서야 가족의 온도가 얼마나 가까이에 있었는지를 다시 알게 되었다. 지독했던 감기가 지나가고 나면, 우리 가족은 아마 그 온기만큼 한 뼘 더 단단해져 있을 것이다.






ChatGPT Image 2025년 12월 30일 오전 11_59_15.png 아프다는 건, 잠시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아도 되는 허락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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