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니 왠지 감상적인기분에 젖어든다. 음악을 듣기 위해 뮤직 앱을 켜니 요즘 즐겨 듣는 젊은 여가수의 노래가 자동 재생된다.
"I'm afraid to hang out with your friends..."
섬세하고 고운 목소리가 비 오는 밤에 차분하게 잘 어울린다.
비 오는 날은 몸의 감각기관이 더 활성화되는 것 같다. 커피도 더 진하고 맛있게 느껴지고 음악도 더 분위기 있게 들린다. 언젠가 추적추적 비 오는 날 구두 속에 빗물이 들어갈까 잔뜩 신경 쓰며 거리를 걷고 있는데, 어느 카페에서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다. 비가 와서 그랬을까. 평소에는 그리 선호하지 않던 진한 색소폰 음색이 듣기 좋았다. 그 끈적끈적한 선율에 휘감기다 보니 갑자기 서울에서 재즈의 본고장 뉴올리언스로 순간이동을 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습한 공기가 커피 향을 머금고 있어서 후각과 청각이 동시에 자극되어 그날은 내게 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내리는 비를 보고 있으니 기억은 더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덟살 무렵이었나. 콘크리트 바닥 위로 떨어져 흐르는 빗물 줄기를 보며 마치 파도 같다고 느꼈다. 시시각각 흐름이 변하는 물줄기를 보며 파도를 피하는 것처럼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밤에는 바닥의 빗물에 가로등 불빛이 비추어 별처럼 반짝였다. 거대한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인이 된 상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소나기가 쏟아질 때는 언덕길을 따라 콸콸 흐르는 빗물에 발을 담그고 마치 계곡에라도 놀러 온 양 철벙거리며 돌아다녔다. 유년 시절비는내게 '상상'이라는,또 다른 세상으로 가는 날개를 달아주었다.
이제는 그 날개의 흔적조차 없지만, 이렇게 비 오는 날은 움찔움찔 다시 날개가 돋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다들 잠들어 있는 정적 속에서 홀로 깨어,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대기를 들이마시고, 밤의 고요를 온몸으로 느낀다. 모든 사물이 침잠하는 가운데 지나간 시간을 추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