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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볕 Jun 17. 2021

커피, 삶에 스며들다

커피와 관련된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



"흐음"

힘껏 기지개를 켜며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리저리 스트레칭을 하며 남아 있는 잠 기운을 떨쳐보려 해도 여전히 정신은 몽롱하니 희뿌연 안갯속을 헤매고 있다. 이럴 때는 진한 아메리카노가 필요하다. 커피는 나에게 약이자 비타민이자 에너지원이다.


에티오피아의 힘을 뜻하는 단어인 Caffa에 어원을 두고 있는 커피는 그 이름만큼 정신을 일깨우고 신체리듬을 활성화시키는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일까. ‘빨리빨리’의 민족으로 유명한 우리나라 사람에게 유독 커피가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일의 속도와 능률이 중요시되는 사회에서 느긋하게 오랜 시간 즐기는 티타임보다 짧은 시간에 빠른 각성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커피 브레이크가 더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커피와 나의 역사를 되짚어보자면 그 옛날 국민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시절 엄마는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으셨다. 아마도 우리 삼 남매를 키우시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커피 한 잔 마실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가끔 우리 집에도 예쁜 사기 찻잔에 찰랑찰랑 보기 좋게 커피가 담겨 나오는 날이 있었는데 바로 손님이 올 때였다. 그런 날에 엄마는 단정한 색상의 꽃무늬 찻잔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인스턴트커피를 담고 접시에 과일도 정갈하게 깎아 내셨다. 평소에는 찬장 깊숙이 보관되어 있던 찻잔과 접시는 그럴 때만 우리에게 그 자태를 드러내곤 했다. 어린 내게 갈색의 향기로운 액체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엄마가 손님을 배웅하러 나간 틈을 타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잔에 남은 걸 몰래 맛봤던 기억이 난다. 혀에 닿았던 텁텁하고 달착지근한 맛. 그것이 커피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고등학교 진학 후에는 공부한다는 핑계로 커피를 자주 마시게 되었다. 도서관에 가서 친구들과 컵라면을 사 먹고 자판기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수다를 떠는 게 당시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그때는 뭐가 그리 즐거웠는지 작은 것 하나에도 까르르 웃어 대며 벤치에 앉아 수다 떠느라 공부는 뒷전으로 미루었던 생각이 난다. 한참 이야기에 열중하다 보면 손 안에서 차갑게 식어 있는 커피를 발견하고 후다닥 들이켜던 순간들. 엊그제 같은데 벌써 몇십 년 전의 일이다.


대학에 진학한 이후 원두커피 전문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믹스커피에 길들여진 내 입맛에 블랙 원두커피는 쓰고 탄 맛이라는 새로운 미각 경험을 선사했다. 갓 스무 살 신입생이었던 나는 유행을 좇느라 공강 시간이나 수업 후에 자주 커피 전문점에 들러 시간을 보내곤 했다. 당시 대학가 앞의 커피 전문점은 경쟁이 치열해서 토스트와 잼, 버터를 무료로 제공하는 곳이 있었고 그런 가게는 학생들의 아지트가 되곤 했다. 그때 커피 전문점에서 팔던 커피는 원두의 신선도와 향미가 다소 떨어지는 것이었고 그래서 주로 헤이즐넛 향을 입힌 가공커피가 인기를 끌었다. 커피 맛은 그저 그랬지만 큼직한 소파가 있고 테이블마다 유선 전화기가 있던 그 공간이 주는 편안함과 여유로움 때문에 나 역시 그곳을 즐겨 찾곤 했다. 90년대는 휴대폰이 보편화되기 전이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삐삐를 사용했고 커피 전문점 테이블에 놓인 전화로 청춘들은 서로의 삐삐를 호출하거나 자신의 삐삐 음성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보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고루한 이야기 같지만 그 시절 나름의 낭만과 운치가 있었다.


대학 졸업 후 무역회사의 해외 지사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커피의 맛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 내가 근무했던 곳은 커피 산지로 유명한 곳이라 어디서든 갓 로스팅한 신선한 원두로 내린 커피를 맛볼 수 있었다. 혀 끝에서부터 존재감을 뽐내며 입 안 전체를 강렬하게 채우는 원두의 풍미는 그동안 내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또한 고소한 우유 거품을 잔뜩 올려 시나몬 가루를 솔솔 뿌린 카푸치노의 매력도 처음 알게 되었다.






한 번 커피 맛에 눈을 뜨니 일반 커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오고 난 이후 유명 산지 별 원두를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집에서 커피를 즐기게 되었다. 주로 ‘수마트라 만델링’이나 ‘케냐 AA’같이 묵직한 바디감과 풍부한 향이 느껴지는 원두를 자주 마셨고 가끔은 ‘과테말라 안티구아’나 ‘코스타리카 따라주’처럼 산미가 느껴지는 원두를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하고 나서는 아무래도 미혼일 때처럼 취향대로 커피를 마시지는 못하게 되었다. 재테크에 관심이 생기면서 밥보다 비싼 커피를 마시는 건 낭비 같은 생각에 점점 경제적인 쪽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각각의 원두를 싱글 오리진으로 내린 핸드드립을 선호했는데 요즘은 여러 가지 원두를 블렌딩 해서 추출한 대중적인 취향의 아메리카노를 즐겨 마신다. 심지어는 마트에서 파는 인스턴트 블랙커피도 그럭저럭 마실 만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기분전환도 할 겸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숙련된 바리스타가 손수 내려주는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그럴 때는 ‘가성비’라는 단어는 잠시 내려놓는다.


커피 한 잔에 잔잔한 음악 그리고 책 한 권이 있다면 그곳이 내게는 가장 편안한 안식처이다. 삭막하던 공간도 커피 향이 감돌면 훨씬 포근하고 안락하게 느껴져서 마치 내가 아까와는 다른 공간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제는 커피를 많이 마시면 속이 쓰리고 수족냉증이 심해져서 어쩔 수 없이 조금씩 자제하고 있다. 그래도 이 즐거움만은 끊을 수 없으니 의지박약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아마도 노인이 되어서도 커피에 대한 갈망은 계속될 것 같다. 몇 년 전 이탈리아 여행에서 본 노인들처럼 노천카페에서 커피를 즐기는 여유와 건강이 허락되는 노년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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