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에 앉아 책을 읽다가 눈이 피로해져서 고개를 들었다. 한낮의 쨍하던 햇살이 한풀 꺾인 오후 5시, 거실 창 너머, 어둑해진 하늘을 배경으로 비행기 한 대가 지나간다. 요즘 같은 시국에 어떤 사람이 해외로 가는 것일까. 급한 사정으로 외국에 체류 중인 친지를 만나러 가거나, 출장을 가는 사람일까, 아니면 팬데믹 상황으로 생업을 접고 한국에 들어왔다가 다시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는 사람일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내가 살던 집은 널찍한 야외 베란다가 있던 주택이었는데 거기서 늘 하늘을 쳐다보며 이런저런 공상을 하곤 했다. 여느 때처럼 하늘 높이 떠가는 비행기를 보며 "와, 미국 가는 비행기다."라고 신나서 소리쳤는데, 옆에 있던 막내 이모가 핀잔을 주었다.
"얘, 너는 저게 미국 가는 비행기인지 어떻게 알아? 미국이 아니라 외국이라고 해야지."
당시 7-8세 무렵이었던 나는 미국과 외국의 차이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80년대는 미국의 영향력이 지금보다 훨씬 크던 때라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는 모두 '미국'인 줄 알던 꼬맹이 시절이었다. 이모의 핀잔으로 '미국'과 '외국'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다음부터는 강박적으로 구분하게 되었다.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서였을까, 지금도 비행기를 보면 그날의 일이 떠오른다.
비행기에 대한 또 다른 추억이 있다. 대학교 때 휴학하고 잠시 어학연수를 다녀온 적이 있다.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 조금과 부모님의 지원으로 경비를 마련해서 생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던 날, 태어나서 자란 땅을 떠난다는 사실에 어찌나 감정이 북받쳐 오르던지 이륙하던 비행기 안에서 눈물을 글썽였다. 홀로 태평양을 가로질러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에 가야 한다는 부담감과, 좁은 이코노미 클래스의 불편함,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이 만들어내는 낯선 소음과 냄새에 둘러싸여 불안해하다가 몇 번의 기내식을 먹고 차츰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비로소 처음 해외를 나가는 설렘과 흥분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무수하게 일하러, 여행하러 비행기를 탑승했지만 처음 비행기를 타던 날의 그 생경하면서도 두근거리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는 예전에 비해 항공료가 저렴해져서 비행기 타는 게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일 년에 한두 번 여행을 가기 위해 비행기에 오를 때면 여전히 설렌다. 항공사마다 다르게 제공되는 기내식도 좋고, 몇천 미터 상공에서 맥주나 와인을 마시고 얼근하게 취하는 기분도 좋다. 그중에서도 특히 일상을 벗어나 낯선 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할 생각에 가장 행복해진다.
오늘도 비행기는 사람들의 기대, 희망, 불안 등 여러 감정을 싣고 하늘을 가로질러 유유히 떠간다. 비행기를 보고 있자니 불현듯 예전에 다녀온 여행지가 그리워진다. 빨리 이 감염병 상황이 종식되어, 다시 하늘길이 열리고 일상을 벗어나 낯선 나라로 훌훌 떠날 수 있길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