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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볕 Dec 21. 2022

건망증이 아닙니다. 어휘력 부족입니다.

<어른의 어휘력>을 읽고


'말 잘한다'. 어릴 때부터 늘 내게 붙어 다니던 평가였다. 이 말은 '발표력이 좋다', '조리 있게 의견을 말한다' 등으로 표현을 달리하며 중고등학교 시절 내 생활기록부의 특기사항란을 채웠다. 그때는 한번 보거나 들은 단어는 모두 스펀지처럼 흡수하던 때라 어휘력 부족은 내겐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대학에 진학하고 입시에서 해방된 기쁨에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책 읽기는 뒷전으로 하다 보니 견고할 것 같았던 어휘 구사능력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리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1990년대 후반 본격적인 인터넷의 보급과 맞물려 그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책에서 손을 놓고 인터넷과 PC 통신 세상만 누비다 보니 단순한 말만 사용하게 되어 맞춤법이 헷갈릴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20대 때의 어휘력 감소는 그대로 30대로 이어졌고, 그제야 위기의식을 느낀 나는 부랴부랴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집중력이 현저히 낮아진 상태라 책 속의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40대가 되었고 지금은 새로운 어휘를 숙지하기는커녕 알던 단어도 잊어버리는 노화의 과정을 밟고 있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을 만났으니 나를 위한 맞춤형 도서인 셈이다.

사실 처음에는 큰 기대 없이 책을 펼쳤다. 그런데 어라? 내가 모르는 단어가 이렇게 많았나? 이르집다, 시틋하다, 새물내, 끌끌하다, 고상고상 등... 우리말 내공이 상당한 저자에게 관심이 생겨 집중해서 읽기 시작했다. 1장에서 작가는 어휘력의 중요성과 의미에 대해 짚는다. 다음으로 2장에서는 어휘력을 키우기 전에 전제되어야 하는 마음자세에 대해 언급하고, 3장과 4장에서는 어휘력과 문장력을 키우고 사고력을 확장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준다. 26년간 라디오 방송 작가로 일해 온 작가의 경험과 노하우가 담겨 있어서 어휘력 향상뿐 아니라 글쓰기에도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책을 읽으며 인상적으로 다가온 구절들을 발췌해 본다.​

1. 책을 읽는 행위란 나에게, 내가 사랑하거나 사랑할 이들에게 당도할 시간으로 미리 가 잠깐 사는 것이다.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이라 당장 이해하기 힘들어도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는 모양이군.' 하는 식의 감(感)을 얻는다. 신비로운 일이다. 정신 밭에 뿌려둔 감(感)이라는 씨앗은 여하튼 어떻게든 자란다. (중략) 이해하지 못하는 책을 그래도 읽는 게 좋으냐는 질문에, 내 의견을 말했다. "이해하지 못해도 읽으면 좋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면 못해서 기억에 남습니다. 잊고 살다 어느 순간 찾아옵니다. 이제 이해할 수 있을 때가 된 거지요. 그때 다시 읽으면 기막힌 내 이야기가 됩니다." p.26

어떤 책을 읽었을 때 이해하기 어렵다면, 시간이 흘러 나중이 되었을 때 다시 읽어보라. 예전과는 다른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저자 역시 열아홉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난해한 감정을 느꼈지만 그때 느꼈던 모호한 감(感)을 모태 삼아 뼈가 자라고 살이 붙어서 나중에 살아가면서 인생 자락의 고비에 놓일 때마다 뜨거운 회초리를 휘두르는 어떠한 형상이 되었다고 말한다.​​

2. 언어는 나다. 나의 세상은 언어의 한계만큼 작거나 크다. p.49

우리는 직접 경험뿐 아니라 간접 경험을 통해서도 세상을 넓혀간다. 간접 경험에서 언어는 큰 역할을 한다. 문해력이 좋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으므로 그의 세상은 더 커지게 된다. 언어를 통해 경험해 보지 않은 것들을 접할 수 있다면 멋진 일이 아닌가.​​

3. "물건은 고쳐 써도 사람은 고쳐 쓰는 것 아니다."라고 하는 말도 서늘하다. 무슨 뜻을 전하고 싶은지는 잘 알겠다. 그러나 표현이 과격할 뿐 아니라 분수없다. 누가 사람을 고치고 누가 사람을 쓴단 말인가? 조물주라도 되는가? 사람은 물건이 아니다.   
'몸값'이라는 어휘는 나만 불편할까. '트레이드 머니(Trade money)', '이적료'라는 용어가 멀쩡히 있는데 무슨 인신매매단도 아니고 기어이 '몸값'이라 하는 심리는 뭘까? 선수의 실력과 조건, 잠재력에 매기는 가치지 몸뚱이를 보고 쳐주는 값이 아니니 뜻을 제대로 옮긴 것도 아니다. 방송이나 언론에서 아무렇지 않게 몸값 운운하는 걸 들으면 낯 뜨겁다. (중략) 우리는 어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졌다. 영혼을 베는 말과 일으키는 말,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p.109-113

이 책은 어휘력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한편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표현들에 대한 경각심도 일깨운다. 산업 경제 도입 후 인간의 도구화가 우리 삶 곳곳에 배어 들어 사람에 대한 존중이 사라지고 있다고 저자는 우려한다. '몸값'은 나 역시 종종 쓰던 말이라서 순간 뜨끔했다. 언어도 생각을 오염시킬 수 있다는 조지 오웰의 말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좀 더 세심하게 선별해서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4. 만나서 얼굴 보며 대화 나누는 일은 드물다. 온라인에서 다른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을 습관적으로 '본다'. (중략) 랜선 친구는 현대인의 인간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상처받고 싶지 않고 손해 보고 싶지 않고 골치 아파서 거두어들인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 진정한 공감이나 소통보다 자신의 우울감이나 불안감을 덮어줄 도구로서 기능해주기를 바라는 관계, 알고 싶은 것만 더 많이 알고 싶고 알고 싶지 않은 것은 계속 알고 싶지 않다. p.152-153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얄팍한 인간관계가 현대인의 언어적 직관력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된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나 역시 코로나19로 인한 거리 두기 기간 동안 사람들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온라인 콘텐츠만 보다 보니 의사소통 능력이 저하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나와 상대의 감정과 말을 해석하고 공감하는 행위를 통해 어휘력을 키울 수 있으므로 적당한 인간관계는ㅡ 피곤하고 부담스러울지라도ㅡ 우리 삶에 꼭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5. 자신이 가진 지독한 고정관념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스타인처럼 주변에 있는 물건, 음식, 방 등에서부터 깨뜨린 고정관념은 우리가 중요하다고 믿는 사랑이나 행복, 돈, 성공 등으로 연결될 것이다. 고정관념을 파괴하면 사고의 한계를 확장할 수 있다. (중략) 고정된 정의에서 벗어나 보는 방식이 달라지면 어휘의 쓰임새가 달라진다. 어휘의 쓰임새가 달라지면 의식의 세계가 커지고 깊어진다. p.291-292

개인적으로 내게 필요한 조언이었다. 타고난 성향도 원칙, 규칙, 질서를 중요시하는 데다가 주입식 교육까지 받은 세대이다 보니 고정관념에 갇혀서 세상을 보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사고가 경직되어 있고 사용하는 어휘의 폭도 좁다. 단단한 사고의 틀을 깨고 좀 더 유연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말과 글로 표현하고 싶다. 주변의 작은 사물부터 새로운 눈으로 관찰하며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연습을 해봐야겠다.​​

6. 한갓지게 커피 한 잔 음미하듯 낱말을 음미해 보자. (중략) 낱말을 뒤 살피고 음미하면 뇌의 뉴런이 새로운 연결망을 생성한다. 그 낱말에 어울리는, 혹은 너무 어울리지 않아 아이러니한 경험이나 생각이 떠오른다. 붙잡아 글로 앉혀보자. p.295

작가는 어휘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으로 낱말을 뒤 살피고 음미할 것을 제안한다. 한 단어에 여러 가지 뜻이 있고 상황에 따라 달리 쓰이는 만큼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보며 말뜻과 말맛을 곱씹다 보면 어휘를 마음대로 부리어 쓸 수 있는 능력인 '어휘력'을 한층 강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7.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달변의 조건이 있다면 인간을 이해하는 것, 그중에서도 앞서 오뒷세우스가 연설했듯 '우리의 몸에서는 가슴이 손보다 더 유능하고 우리의 모든 힘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사람은 머리로 안다 해도 가슴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변화하지 않는다. p.371

이 책은 말을 잘하기 위해서는 결국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풍부한 지식과 빼어난 말솜씨를 가지고 있어도 재미든 감동이든 마음을 건드리는 요소가 없다면 AI와 대화하는 기분일 것이다. 말만 청산유수인 사람보다 조금 어눌해도 진정성이 담긴 말을 건네는 사람에게 우리는 마음을 연다. 이런 인간의 특성을 잘 이해하는 것이 말을 잘하는 비결일 것이다.​

이 책은 어휘력 부족이 유발하는 문제를 짚어보고 어휘력의 쓸모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는 단순히 낱말을 많이 알고 말발이 센 것보다는 낱말에 대해 잘 알고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어른에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어휘력을 키우는 일은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내 감정을 품위 있게 제어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며, 공감과 소통 능력을 높이는 일이자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원해서 선택한 도서가 아니라 독서모임 때문에 읽은 책이라 끝마치는데 시간이 좀 오래 걸렸다. 처음에는 흥미를 가지고 읽기 시작했는데 뒤로 갈수록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이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어휘들을 알게 되어서, 그리고 글 쓰는 데 참고할 만한 팁들을 얻을 수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유튜브와 SNS가 주요 정보매체가 된 지금 갈수록 어휘력 부족으로 불편함을 겪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오랜만에 어휘의 바다에 풍덩 빠져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면서 말뜻과 말맛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PS. 요즘 부쩍 건망증이 심해져서 적확한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길래 노화 탓이려니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건망증이 아닌 어휘력 부족일 수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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