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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볕 Dec 26. 2022

박싱 데이의 추억

매년 12월 26일의 손님


어릴 때는 일 년 내내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렸다. 매년 선물을 받은 건 아니었지만 자고 일어났을 때 어쩌다 한 번씩 머리맡에 선물이 놓여 있으면 입이 귀에 걸리곤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크리스마스는 산타 할아버지가 우리 집을 그냥 지나쳤는지(아니면 부모님이 바쁘셨는지) 선물 없이 지나가곤 했다.

선물을 받건 안 받건 크리스마스는 내겐 마법 같은 느낌을 주는 날이었다. 12월 중순부터 성탄절까지의 기간은 어린 내가 딱 집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설렘과 낭만이 가득했다. 거리에는 캐럴이 울려 퍼졌고 어른들도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문방구와 팬시점에서는 조악하기 그지없는 인조 트리와 색색깔의 요란한 장식들을 팔았다. 그곳에서 축 성탄, 근하신년 등의 문구가 적힌 카드와 연하장을 사서 볼펜으로 힘주어 글씨를 꼭꼭 눌러쓰고는 부모님과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에게 건넸다. 땡그랑땡그랑하는 구세군 냄비의 종소리가 거리를 채우고 그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성탄절 무렵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설레던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어제까지 반짝거리고 아름다웠던 트리도, 마음을 달뜨게 하던 캐럴도 김 빠진 콜라처럼, 생기를 잃은 꽃처럼 시들해졌다. 크리스마스의 마법이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하루 만에 반짝거리던 설렘이 사라지고 칙칙한 회색빛으로 변해버린 세상을 보며 잔뜩 풀 죽어 있었는데 그런 내 마음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라디오에서 나긋나긋한 DJ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러분, 크리스마스가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바로 박싱 데이입니다. 영국이나 호주 같은 나라에서는 12월 26일도 휴일이에요. 성탄절에 받은 선물을 상자에 넣어 보관하는 날이라 박싱 데이라고 부른다고 하네요."


방금 전까지 어둡기만 하던 마음에 반짝하고 불이 켜지는 기분이었다. 오늘이 박싱데이라고? 상자에 보관할 선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다른 나라에서 특별한 날이라고 하니까 크리스마스의 마법이 하루 더 연장되는 기분이었다. 그날은 그렇게 별일 없이 지나갔지만 그 라디오 방송의 기억 때문에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12월 26일이 박싱 데이라는 걸 떠올렸고 크리스마스의 설렘을 하루 더 연장할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인터넷을 검색해 보고 내가 알고 있던 뜻과 원래의 뜻이 다른 것을 발견하고는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뭐 어떠하랴. 의미가 맞고 안 맞고를 떠나서 그날 그 방송 덕분에 우울하던 12월의 어느 날 위로를 얻은 조그만 꼬맹이가 있었다.

참고로 내가 찾은 박싱데이의 뜻을 아래에 첨부한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2월 26일을 가리키는 말로, 과거 영국과 영연방 국가에서는 이날을 휴일로 삼고 하인들에게 선물을 했다. 오늘날에는 파격적 할인가로 제품을 판매하는 크리스마스 전후의 쇼핑 시즌을 지칭한다.

박싱데이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대부분 크리스마스에 가난하거나 신분이 낮은 이들에게 베푼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력한 설들을 살펴보면,

1. 중세시대 영국에서는 고용주가 크리스마스에도 일을 해야 했던 하인들에게 그다음 날인 26일에 휴가를 주었다. 이때 고용주는 선물이나 보너스 혹은 남은 음식을 담은 상자를 하인들에게 마련해 주었다. 하인들은 가족과 함께 이를 나누며 휴가를 즐겼다.

2. 교회에서 크리스마스에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기부 상자를 만들어 헌금과 선물을 받은 뒤, 다음 날 성직자가 이 상자에 모인 기부 물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아마도 상자에 선물을 넣어서 전달한 데서 'boxing day'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 같다. 선물을 받은 사람이 상자에 넣어 보관한 데서 유래했다는 은 어디에도 없는데 그날 DJ의 멘트는 내 기억의 왜곡으로 인한 것일까. 어쨌든 '박싱 데이'라는 단어는 내 뇌리에 콕 박혀서 매년 12월 26일이 되면 어김없이 그때의 어린 내가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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