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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볕 Feb 13. 2023

헌 집에 살고 있습니다

집에 대하여


살다 보면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된다. 글쓰기라는 공통된 취미를 가진 이들이 요즘 내 삶의 새로운 방문객이다. 그 글벗 중 한 분이 최근에 새 아파트에 입주하게 되어 집들이에 다녀왔다. 밥도 갓 지은 밥이 촉촉하고 윤기가 흐르듯, 집도 새로 지은 집이 좋긴 하더라. 번듯하게 잘 빠진 구조의 신축 아파트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15년이 넘은 구축 아파트와 여러모로 비교가 되었다.


집은 요즘 내게 가장 큰 화두이다. 결혼 후 전세살이를 거쳐 처음 내 집을 마련했을 때의 뿌듯함, 그리고 잘못된 판단으로 집을 매도하여 다들 몇억씩 벌던 부동산 상승기에 겪어야 했던 상대적 박탈감, 최근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계획하며 집을 내놓고 매수자 우위의 시장에서 느끼는 초조함까지 집으로 인한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살고 있다.


그런데 그 감정이라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국 '욕심'이다. 실거주라 하더라도 내가 살고 있는 집이 남들보다 많이 올랐으면 하는 욕심, 집으로 인한 시세차익을 통해 부를 일구고 싶은 욕심, 그걸 내려놓지 못하니 불행하고 초조한 것이다.


운 좋게 남들보다 조금 앞선 출발선상에서 시작했지만 그저 저축만 열심히 할 줄 알았지 남의 돈 빌려 쓰기를 두려워했던 우리 부부는 급격한 부동산 상승장을 거치고 나자 친구나 지인들과의 부의 격차가 한참 벌어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허탈하고 속상했지만, 그동안 행복의 기준을 지나치게 '물질'에만 두고 살았다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상황은 변하지 않으니 괴로움의 늪에서 빠져나오려면 생각을 바꿔야 했다.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렸고 차츰 '물질' 위주의 사고방식을 내려놓게 되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물론 아직도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어서 외부의 요인들로 인해 평정심이 흐트러질 때도 있지만 곧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최근에 읽은 고(故) 이어령 교수의 에세이집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에서 '집'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기억에 남아 이곳에 옮겨본다.


우리는 태어날 때 돈이 있든 없든 한 공간을 차지해. 그게 몸뚱이야. 그래서 '몸집'이라고도 불러. 절대의 공간, 나를 죽이지 않고는 누구도 이 몸집만큼의 공간을 빼앗아 갈 수 없어. 그런데 몸집만 가지고 어떻게 사니. 몸뚱이가 움직일 수 있는 곳, 누울 수 있는 곳, 서서 걸을 수 있는 곳이 필요하잖아. 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 그것이 인간의 삶이고 생존 공간이라는 거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자기 몸은 아끼고 사랑해. 성경에도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어. 내 사랑하는 몸, 그래, 그 생명의 '몸집'의 집을 키우고 넓힌 것이 바로 우리 가족인 거야. - 65p
너는 아기집에서 시작하여 영혼의 집으로 들어가 거할 곳을 마련한 것이야. (중략) 그래, 이곳에서 쉬어라. 그 집에 편안히 머무는 너에게 편안한 굿나잇 키스를 보낸다. - 81p


'집'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딸에게 아버지는 우리의 몸, 즉 생명의 '몸집'의 집을 키우고 넓힌 것이 바로 가족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기집에서 시작하여 영혼의 집으로 돌아가 쉬고 있는 딸에게 굿나잇 키스를 건넨다. 살아생전에 해주지 못했던 편안하고 다정한 인사를.


'아기집'을 벗어나 '몸집'을 가지고 살다가 '영혼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생이다. 그 여정 내내 '집'은 우리와 함께 한다. 이제는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집'이 아니라 내 몸이 쉬는 곳, 사랑하는 가족이 머무는 곳으로 인식을 전환해 보면 어떨까.


집들이가 끝나고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다. 방금 새 집을 보고 왔으니 확연하게 낡아 보이리라 예상한 것과는 달리 아늑한 편안함이 나를 맞아준다.


마음에 꼭 드는 집은 아니지만 사는 동안 고맙기는 했다. 동향이라 아침에 일직선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불평한 적도 있었지만 그 덕분에 아침잠 많은 내가 일찍 일어날 수 있었고, 뒷발코니 쪽으로 펼쳐지는 산 전망 덕분에 사계절의 변화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 집에서 직장을 관두고 코로나 시국을 견디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 과정을 통해 글을 쓰는 '나'로 거듭날 수 있었고 시야를 넓히고 더 성장하게 되었다.


거래가 얼어붙은 시장에서 운 좋게 매수자가 나타나 계약을 체결했고 이제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해야 한다. 다음 보금자리에서는 더 설레고 가슴 뛰는 순간들이 찾아오길, 그리고 우리에게 소중한 '집'이었던 이곳에 이사 오는 분에게도 평안과 행복이 함께 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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